풍수지리

양동마을 이야기- 무첨당

약천(藥泉) 2015. 6. 15. 16:17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 - 무첨당

보물 제 411호인 무첨당은 양동의 여주이씨(驪州李氏) 대종가의 제청(祭廳)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안채는 1500년 전후에 지어진 양동에 세거(世居)한 여주 이씨의 대종가로써 마을의 진산인 설창산에서

남쪽으로 힘차게 내려가던 기운이 경산서당부근의 과협(過峽)을 지나면서 동쪽으로 빠져나온 기운이

힘차게 뭉친 수졸당 동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성주산(聖主山)을 안대(案對)로 동남향으로 자리매김

질 한 튼 ㅁ 자 형의 전통 한옥이다.

(튼 ㅁ자 형의 한옥은 마당을 넓게 확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첨당이란 시경(時經)에 나오는 무첨이소생(無添爾所生 : 너를 태어나게 해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마라)

에서 나온 말로서 여주이씨 양동 입향조인 찬성공 이번의 손자 이의윤의 아호다.

무첨당은 이 의윤이 입향조의 불천위 사당과 함께 제청으로 지은 건물이다. ( 사당은 유교 예제의 원칙상

안채의 좌측 위쪽에 있어야 하나안채의 뒤쪽 위에 있기 때문에 상하 관계라는 서열상 문제가 없다)

 

무첨당은 군자남면(君者南面: 군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야 한다)이라는 유교 논리에 따라 남향으로

매김질  되었으며 서쪽으로 꺽어진 ㄱ 자형 건물이다. 건물이 서쪽으로 꺽어진 것은 안대로 삼은 성주산의

기운을 건물과 마당에 가득 담으려는 주인의 욕심(?) 이었으리라..

 

누마루의 처마선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담아 금방이라도 날아 갈듯이 하늘을 향해 펼치고,

누마루 아래는 생긴대로 갖다 세운 기둥과 , 자연석으로 아무렇게나 놓은 주춧돌, 그것들과 마주하는

성주산의 빼어난 자태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던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한 선비

정신을 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첨당의 우측에는 방이 하나 달려 있다. 언덕위에 있는 사당의 조상에게 문안 인사라도 드리는 듯 고개

숙인 모습으로 고요함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 건물에서 하늘을 날아 오를듯한 동적인 아름다움과 살며시 고개를 숙인듯한 정적인 고요함에 탄성이

절로 난다. 정과 동은 곧 음양을 상징한다. 하나의 건물에서 음양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현해 놓은 우리 전통

건축의 백미다. 마당이 비워진 공간이면 건물은 채워진 공간이고 마루가 비워졌으면 방이 채워진 공간이다.

 

비움과 채움으로 자연을 담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인간이 욕망을 빈틈없이 담아낸 건축 예술품이다.

무첨당의 맞은편 물봉동산에서 바라보면 사당과 안채, 무첨당의 건물이 품(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品이란 곧 벼슬의 품계를 말한다. 즉 입신양명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는 후손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무첨당의 대청마루에는 다양한 서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나무 뿌리를 씹어

죽필(竹筆)로 쓴 좌해금서(左海琴書: 한양의 좌측 즉 영남을 뜻함, 영남의 진정한 선비가 머물고 있는 곳

이라는 의미)는 힘이 넘치는 필치다. 또한 물애서옥(勿厓書屋: 물봉 언덕 비탈에 선비가 있는 집)

창산세거(蒼山世居: 설창산 아래 대대로 거주하는 집)등 여러 편액이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무첨당은 본래가 담이 없는 개방된 건물이었다. 아마도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주인의 이상을 담았을 것이다. 지금은 담과 대문이 있어 아늑한 기운은 좋으나 무첨당 앞에서 성주산을

가리고 있는 오래된 목련나무는 무첨당을 한낮 볼품없는 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아쉽다.

또한 무첨당 입구에 늘어선 탱자나무는 집을 향해서 언덕을 오르면서 느끼는 아늑함을 무시무시한 침(針)

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는 것 같아서 제거 하면 지금 보다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