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이야기 - 서백당
* 또 한명의 인물 탄생을 기다리는 양택 대명당 - 서백당(書百堂)
땅의 기운을 살펴서 어떻게 활용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을 미시풍수학이라 한다.
양동마을은 어떻게 땅을 활용하였는가를 미시풍수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설창산 문장봉에서 힘차게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려오는 산줄기 하나가 서백당 뒤로 들어가고 있다.
세조3년(1457년)에 지어진 현존하는 고택중 완전한 살림집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집이다
(시기적으로는 아산의 '맹씨행단' 이지만 완전한 살림 집으로 보기 어렵다)
서백이란 당호는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는 말)의 의미도
있지만 서백(書百)은 곧 서백(瑞百)가 같은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백가지(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 상서로운 일이 가득한 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세명의 현이니 태어난다는 대 명당 터에 지어진 비으로 경절공 우재 손중돈선생과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
이 태어난 후 한사람의 걸출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 서백당은 외손(外孫) 발복지(發福地)다
서백당의 집터는 주산인 도음산의 우측 산줄기로 우백호의 기운이 강하고 현무봉인 설창산의 산줄기들이
집의 우측으로 감아 돌면서 세 겹으로 감싸고 있어 우백호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지세다.
우백호는 음(陰)의 기운이 강하고 그것은 친손 보다는 외손의 발복이 강한 터가 된다. 그래서 예부터 양동을
외손이 마을 이라고 불리어 졌으며 우재선생이나 회재선생 또한 외갓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설창산 문장봉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서백당 담당 안에서 큰 기운을 토해내고는 (집 뒤 담장 안쪽에 기(氣)가
뭉쳐있는 잉(孕)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 힘없이 대문의 남쪽에서 끝을 맺는다.
(현재 서백당 자연석 표지석 위치, 풍수적으로는 기운이 흘러 나가지 못하게 누르고 있는 형국으로 좋음)
서백당 안으로 들어온 기운은 안채 대청마루 좌측의 산방(産房)을 지나 사랑채 앞마당을 거쳐서 담장 밖
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으로 흘러가는 지맥에서 서남향으로 매김질 되었다.)
* 서백당의 풍수논리
서백당 본채의 풍수논리는 동진시대 곽박이 쓴 최고의 풍수서인 금낭경의 구사세택팔용(求四勢澤八龍) 좌향
으로 매김 질 되었다. 금낭경 제2인세편(第二因勢篇)에 있는 구사세택팔용의 좌향 원리는 제1기감편(第一氣
感篇)의 지유사세 기종팔방(地有四勢氣從八方: 땅에는 네 줄기의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8개 방위에 따라서
흘러 간다는 논리) 의 원리를 구체화 시킨 활용법이다.
여말선초시대에 주로 사용되던 풍수논리로서 고차원적인 풍수논리다.
* 서백당은 인물 발복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집이다.
서백당의 풍수논리는 구사세택팔용의 좌향으로 인물 발복에 유리하다는 풍수설에 따라 매김 질 되었으며
또한 깨끗함을 뜻하는 설창산 , 글을 뜻하는 문장봉, 성인을 뜻하는 성주산, 선비를 뜻하는 서백당 등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의 논리와 자연속에서 기운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사람의 노력과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걸출한 인물 출생이라는 결과로 이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서남향집은 천문의 논리에서 하늘의 재물을 상징하는 천시원(天市垣)의 자리가
간좌(艮坐)의 위치라 하여 하늘의 재운이 미친다는 풍수 논리에 따라 전통적으로 서남향이 가장 선호하는
집의 방위가 되었다.
안채는 유교의 정명주의(正明主義 :명분이 분명 해야 행동으로 옮긴다)와 명분과 좌우 대칭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영남학파의 영향으로 반듯한 중정(中庭)을 가진 입구(口)자 형태로 지었으며 집 전체를 막아선
행랑채는 대문 앞의 골짜기와 볼품없이 늘어진 안대를 불견 처리하기 위한 풍수적 용도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앞마당을 반듯하게 담장을 둘러 기막히게 빼어난 문필봉(文筆峰)인 성주산 전체를 마당으로
끌어들여 가득 담고 있다.
* 집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다.
자연은 사람에게 땅을 주고 사람은 땅위에 자연을 담는 집을 짓고 그 집에 담긴 자연은 그 곳에 사는 사람
들의 성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집에 대한 선조들의 가치관이다.
그래서 집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좌묘우사 전조후시( 집의 좌측에 사당이 있고 우측에는 방앗간이나 창고가 있으며, 앞에는 반드시 마당이 있어야 하며 뒤에는 장독대를 둔다)라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 배치되었으며 사당앞의 향나무는 오백년이 넘도록 사당에 향을 피우고 있고 대문에 들어서서
사랑채마루 뒤쪽에 보이는 작은 헛담이야 말로 서백당 풍수의 백미다.
기품과 절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주어진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그런 집이 바로 서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