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도천리 도천숲과 읍참마속(泣斬馬謖)
그림출처: 네이버 백과에서 캡쳐
고찬이(高讚伊)는 고종12년(1875년) 포항시 청하현 화진리에서 태어났다.
그 가문은 알수 없으나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힘써 많은 병서를 읽고 익혔으며
체력이 장대하여 역사로서 인근면동에 그 용명(勇名)이 자자하였다.
구한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침략을 노골화 하여 사실상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뜻한바 있어 대한제국군에 투신하여 대구진위대(鎭衛隊) 오장(伍長)으로 근무하였다.
순종원년(1907년) 일제와 역신들이 모사(謀事)하여 한국군 해산을 단행하였다.
국군해산에 대하여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귀향하는 도중에 만난 산남의진(山南義陣) 소모장(召募將)
정순기(鄭純基)가 영남항왜의병총본영(嶺南抗倭義兵總本營)인 산남의진에 투신할것을 권장(勸奬)하여 입대하였다.
정환직대장 지도하에 소모장(召募將)으로 의병활동을 하면서 전투마다 용감(勇敢)하고 전공이 대단하여
정대장은 첫째도 고찬이 둘째도 고찬이 하며, 신분은 일개 신입 소모장이나 참모급으로 대하고
중요한 군사전략회의에 참석시키는등 십분 그 의견을 존중하니 이로 인하여 오만무례(傲慢無禮) 하여져
다소 군율을 위반(違反) 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정환직대장은 인재부족의 국난시기라는 이유로 관용으로
대하여 이를 어루만져 지도애호(指導愛護)함이 친부자와 다름이 없어 진중(陣中) 장정들도 고찬이를
선망(羨望)하는 정도였다.
정미 10월 영덕(盈德) 도천(道川)숲에서 야영중 불시에 왜병이 내침(來侵)하여 피아열열한 전투가 벌어져
왜병은 소수의 병력으로 내공하다가 의외에도 의병측의 강열한 대항에 부딧치어 후퇴하기 시작하므로
대장 정공은 고찬이에게 1초대(哨隊) 병력을 주어 왜병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고찬이는 이 치열(熾烈)한 전투중에 명령에 불복하고 행동을 지연(遲延)시켜 왜병전원을 토벌(討伐)치
못하여 진중(陣中)이 통분(痛憤)하였다. 대노(大怒)한 부하(部下) 각급 참조진이 고찬이의 군율불복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군율을 바로잡기 위하여 만부득이 총살형에 처하여 후장(厚葬)하였는데
정환직 대장은 삼일간이나 음식을 전폐하고 방문통기(放䎹痛器)하면서
삼국지 제갈공명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을 이제 알았노라고 하더라. -일월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