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鄭珍錫)공의 의거(義擧)
고종말엽 탐관오리(貪官汚吏)가 횡행 천하(橫行 天下)하고 임재이화(荏宰利化)하여 토색학민(討索虐民)이 또한 일상사였다. 당시 흥해군에 안종득(安鐘得)이란 군수가 도임(到任)하여 1년여에 수천만금을 토색(討索)하고 폭정(暴政)을 감행(敢行)하여 고리대금(高利貸金) 족전란발령(族錢亂發令) 송리(訟理)의 불공평등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민원(民怨)이 적적하고 탐욕(貪慾)한 안종득 군수를 군민은 ‘밀제’ 군수라고 별칭 있는 정도였다. 이때 흥해군 관가에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오천인 정진석이란 쾌남아(快男兒)가 있어 안군수의 토색착취(討索搾取)로 도탄(塗炭)에 빠진 군민을 구제하려고 극비리에 흥해군 전역 리동장에게 사발통문을 발송하고 시일을 정하여 마장동(마산리)에 수천(數千) 군중(群衆)을 운집(雲集)시켜 흥해군 관가를 습격(襲擊)하여 안군수 추방(追放)을 성토(聲討)하게 되었다. 정진석공은 흥해군수 안종득의 사리사욕과 탐관오리 가렴주구의 폭정을 논란(論難)하고 군중을 선동(煽動)하여 흥해군 관가를 습격(襲擊)하고 안군수를 추방하려고 관가를 포위하여 내아(內衙)에 난입(亂入)하니 사전에 이를 찰지(察知)한 안군수는 맨발로 신광을 거쳐 도주(逃走)한 후였다. 도주한 파면(罷免)된 안군수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할 무렵이라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매수도임(買收到任)한 후 정진석공을 부사특환(府使特喚)으로 체포(逮捕)하여 동래부로 인치투옥(引置投獄)하고 구필(口筆)로 형용할수 없는 악형고문(惡刑拷問)을 감행(敢行)하며 민란의 수괴(首魁)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려 하였다. 3개월간 악형(惡刑) 태형(笞刑)을 가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태형으로 유혈이 임만(淋滿)하니 차적지(此賊地) 아혈적지(我血烾地) 막대불효(莫大不孝)라 하며 그 유혈(流血)을 수흡(手吸) 자음(自飮)하니 동래부사 안은 범인(犯人)이 부자백(不自白)한 위증조사서(僞證調査書)를 작성하여 민란의 수괴로 참형에 처할 것을 감사에게 장계(狀啓)를 올렸다. 흥해군민이 정공의 위민의거(爲民義擧)에 감(感)한바 있어 경상감사에게 등진(登陳)하여 감사의 령으로 석방(釋放)시켰는데 아직 이 고장에 정공의 의거가 초동목석(樵童木石)의 미담구비(美談口碑)로 전하고 있다. -일월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