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사지
청송사지는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폐사지로 신라 효소왕때 처묵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 근처의 청송마을 전체가 청송사 경내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청송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지금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3기의 부도만이 남아 있다.
1917년 춘담이 두 번째로 크게 확장한 바 있는데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하는 설화가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이 가까운 방현사터의 아미타여래좌상을 오대산의 절로 옮기기 위하여 길을 가던 중
청송사 앞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지고 소나기가 뿌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지자 불상이 있어야
할 곳이 이 절임을 깨닫고 이곳에 모셔 두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불상을 몰래 반출하기 위하여 주문진까지 옮겨갔으나 갑자기 풍랑이 일어
나서 포기하였다. 춘담이 이 소문을 듣고 차아와 예불을 드리고 돌아갔는데 원인 모르게 3년 동안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불상이 나타나 봉안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니 이 곳에 와서
절을 크게 확장하고 불상을 모셔두었고 이내 몸이 나았다고 한다.
청송사 부도중 유일한 청시녀부도이다. 상투는 남정네의 머리 마냥 생긴 이 부도에는 優婆夷 白花堂
朗玉 이라는 명문이 뚜렷하다. 우바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재가자의 부도인 것은 틀림없는데
성을 쓰지 않고 당호와 이름만 달랑 새겨 놓은 것이 특이하다. 이 부도는 원래 청량면 율리 부도골
논둑에 묻혀 있어는데 1990년 고물 수집상에 의하여 전라도까지 유출되었던 것을 지안스님이 주민들과
함께 되찾아 왔다고 한다. 탑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8년 송덕비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봉안 하였다고
한다. 우바이란 청신녀를 가리키는 말로서 출가하지 않고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승려 생활을 하는
여신도를 말한다.
우파이 백화당 낭옥부도
삼층석탑 남쪽 대나무 둔덕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 용도미상의 석물이 있다.
직사각형 기둥 돌의 앞면에 무엇인가 조각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의미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깍인 것 같은 흔적이 보여 인위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설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한쪽에 박혀 있는 석물이
제자리를 못 잡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청송사지 부도들은 청송사터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있으며, 모두 3기가 있는데
조성 양식으로 보아 3기 모두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종형 부도이다.
서로 크기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양식을 하고 있다.
부도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큰 부도는 높이 3.3m 로서 울산광역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높직한 받침 위로 2단의 기단을 두고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석종형부도로서 크기가 클 뿐아니라
받침의 조각수법도 범상치가 않은 매우 아름다운 부도이다.
지대석 위에 기대석을 얹었는데 이 기대석의 앞면에는 신장상의 머리부분만을 양각하였고
뒷면에는 수신상을 음각하였으며 나머지 양측면에는 연화문을 양각 하였다.
이 기대석 위에 복엽복련화대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단엽앙련화좌대를 받쳐 탑신을 안치 하였다.
이 부도에는 특이하게도 탑신의 밑 부분에 범어로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경주 원원사지의 동부도 대석에서도 이와 같이 옴마니반메훔 이 새겨져 있는데 부도에 범어가 나타나는
경우는 흔치 않아 부도의연구에 도움이 된다.
사찰 장엄의 여러 문양들 사이에 범자가 끼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범자 장엄' 이라고 한다.
기대석은 거의 비슷한 형태이나 탑신의 아랫부분에 고사리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연꽃 봉오리를 새겼고 이 봉오리 밑의 탑신에는 복련이 새겨져 있다.
탑신에는 서응당신흡대사 라고 음각되어 있으나 어느 시대의 승려인지 분명하지 않다.
기대석의 사면에는 각 3구식의 화문을 음각하고 있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돌출되어 있다.
또 왼편에도 1기의 부도가 넘어져 있었으나 1982년에 복원하여 현재는 3기가 나란히 잘 정리되어 있다.
이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기단은 아래 윗층이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 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며 지붕돌이 짧아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2층 기단에서 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등
30여 점이 발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