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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답사 자료

약천(藥泉) 2014. 3. 16. 08:43

 

 

 

문화역사길라잡이 03월 정기답사

 일시: 2014년 03월 15일 08시

장소: 포항상공회의소 앞

코스: 영덕 마애불과 석상 → 남호리석탑과 석불 → 관음사 → 인량마을

→ 화수루žd까치구멍집 → 장육사 → 영리미륵불 → 유금사

 

1. 영덕 창수면 인량리 마을

학의 날개 감싸인 배산임수 남향지 세도가 몰린 영남 대표적 양반마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조선시대 수많은 인재가 배출된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이다. 예주(禮州) 사림의 본거지이자 영해부 5대 성(姓) 8대 종가(宗家)가 자리 잡은 곳이다.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위치하고, 지역 학문의 중심이었던 인량리는 수백년간 명문 양반가로서 번성을 누려왔다. 하지만 과거의 명성만큼 현재 인량리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월이 바뀌면서 세상의 중심이 바뀐 탓일까.

재령 이씨 입향조인 통정공 이애 선생이 충효당 뒷편 사당 앞을 지키고 있는

지은 충효당. 최근 부분 복원공사를 끝냈지만 회나무.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오른쪽 가지는 출향 후손,

위에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 마감은 왼쪽 가지는 지방 후손의 성쇠를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상징한다는 속설로 제사때는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이애 선생이 제물을 항상 가지 중간으로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옮긴다고 한다.

위해서 였다고 전해온다.

◆인량리는 어떤 곳인가

과거 영해부에 속했던 인량리의 역사는 삼한시대부터 시작된다. 일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우시국(于尸國)이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현재 인량리 일대가 그 도읍지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한때 인량리가 나라골 또는 국동(國洞)으로 불리기도 했고, 이 마을 출신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이 1992년 나래이동통신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기도 했다.

옛날 영덕 영해(인량리)와 포항 흥해, 울진 평해 등 3해(海)가 경북 동해안 최대 곡창지대이다 보니 인량리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다. 특히 학의 날개가 마을을 품은 듯하고, 배산임수 형태의 남향에 위치해 있어 과거 세도가들은 영해부에서도 최고 명당인 인량리에 앞다투어 뿌리를 내렸다는 것.

고려 말 최대 번성기를 맞았던 인량리에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대흥 백씨와 재령 이씨, 안동 권씨, 야성 정씨, 무안 박씨, 영양 남씨, 영천 이씨, 신안 주씨 등이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충효당(운악 이함의 종택)과 오봉종택(오봉 권책의 종택), 용암종택(용암 김익중이 살았던 집), 갈암종택(갈암 이현일의 종택), 우계종택(우계 이시형의 종택), 소호종택(소호 박신지의 종택)이 들어섰다. 또 삼벽당(이중량의 종택), 원모재(함양 박종산의 종택), 자운정(석계 이시명이 살림을 낸 집), 처인당(영양 남씨 남달만의 집), 강파헌정침(숙종 때 청백리 권상임이 지은 집) 등도 자리를 잡아 현재까지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있다.

이렇게 수천년간 번성했던 인량리는 현대화 과정에서 그 세가 많이 위축됐으나, 여전히 석`박사 배출 마을로 유명하다. 최근 40년간 주민 수가 1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석`박사 30여 명을 배출했다. 현재는 130여 가구 300여 명이 살고 있으며 성공한 출향인사들이 종택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① 재령 이씨 종택, 충효당(忠孝堂)과 우계종택(愚溪宗宅).

중요민속자료 168호로 조선 연산군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효당은 통정공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지금 있는 충효당(사랑채)은 그 후 뒤쪽으로 옮긴 것인데, 운악 이함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602년에 건립했다는 것. 이 건축물은 안채와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후원에는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ㄱ자형 안채와 ㄴ자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높은 기단 위에 후학을 위한 교육장으로 이용된 충효당이 있다. 이곳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고루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이다.

최근 부분 복원공사를 끝냈지만 대청마루 천장은 건축 당시 원형대로 서까래 위에 산자만 엮은 채 흙을 바르는 앙토마감은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이는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듯 이애 선생이 미완성 건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온다.

현재의 충효당 집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선조 때 뒤쪽에 한단 높은 자리로 살짝 옮겨놓은 것이라 한다. 안채와 사랑채와 사당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양반주택, 산 밑 고즈넉한 자리에 위치한 사당이 특히나 눈이 띈다. 아니나 다를까 사당에 얽힌 일화들이 많았다.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 앞에 턱하니 걸터앉아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바라보면 안산과 뒷산의 전경이 마치 붓과 벼루의 모습과 닮아 문필봉이라 하였다. 어릴 때부터 문필봉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훗날 훌륭한 학자가 그리 많이 나왔다는데..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켜 영남유학을 중흥시킨 갈암 이현일선생이 출생해 자란 집이기도 한 것을 보면 그 말이 과히 짐작이 간다.

또한 사당 앞에서 대문 쪽으로 보면 거기엔 인량리 최고령 은행나무가 마치 이 집을 지켜주는 듯이 서있다. 이곳 인량리 마을이 형성(입향)되면서부터 있었던 나무라니 무려 500년의 연세를 기록하며 그 이름도 보호수다. 나라에서 지정한 보호수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우뚝 서 인량리 마을을 고독히 지키고 섰는데, 충효당 쪽에서 보더라도 대문입구에 서서 꼭 이 집을 특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으니.

사당으로 들어서려니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휘황찬란한 모양새로 구부러져 한창인 제철 꽃 색을 뽐내며 사당과 하늘을 향해 기묘한 가지들을 추켜세우고 입구를 비호하듯 서 있다. 알고 보니 이 두 그루의 배롱나무는 '간지럼 타는 나무'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이 배롱나무의 둥치를 살살 간질이면 위의 가지들이 살살거리며 간지럼을 탄다는 일화가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었던 것.

충효당의 사당에는 신기한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눈길을 끈다. 밖에서 사당 대문 안쪽을 바라봤을 때 대문 중앙을 중심으로 나무의 큰 가지가 좌우로 뻗어 있다. 좌측 가지는 서울 등 출향 후손들을, 우측 가지는 지방의 후손을 상징하는 것인데 가지의 강건함이 바로 그 후손들의 성쇠 여부를 알려준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재령 이씨들은 '제사 때 제물을 한쪽 나뭇가지 방향으로 옮기면 다른 쪽 후손이 어려워진다'고 우려해 제물은 항상 나뭇가지 중간으로만 옮긴다고 한다.

② 우계종택: 400년 묵은 고택의 향기

차남이자 그 어린 나이에, 지금 생각해보면 꽃피우지 못한 천재로 요절한 시대의 진정한 문인이 바로 이시형이 아닐까.

스무 살에 감동어린 글귀로 혼란지색에 빠진 영해부를 술렁이게 했던 천재 소년이기에_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조선 선조 때 이야기다.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충효당의 주인)의 손자가 바로 의령현감 운학 이함이고, 운학의 차남이 바로 이 집의 주인, 우계 이시형이다. 그의 이름을 따 우계종택인 것이다. 허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집은 종택이기 보다 그냥 우계정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집의 주인이 운학 이함의 차남이니 말이다. 그 당시 지어진 고택 그대로가 보존되어 가치가 더 높은 우계종택- 지금 우계종택의 모습은 양반이 살았던 집이라고 상상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기가 이를 데 없다. 특히 초가를 이은 행랑채가 집을 떠난 후에도 눈에 삼삼히 그려진다. 당시의 대문채와 행랑채는 사라지고 없지만 조선중기 양반가옥 그대로를 원형보존하고 있는 400년 세월을 담은 집이다.

헌데 집 주인의 사연을 알고 보면 이 집의 이미지와 잘 부합이 되어 화려한 치장이 없는 순수함 그대로의 선비의 집, 400여년 고택의 우직한 효심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우계종택은 효의 집이다. 워낙에 영리하고 문장에 뛰어났던 이시형은 운학 이함이 병환에 드러눕자 무려 3년간이나 치성으로 간호한다. 차남의 몸으로 그 어린 나이에, 지금 생각해보면 꽃피우지 못한 천재로 요절한 시대의 진정한 문인이 바로 이시형이 아닐까 싶다. 스무살의 나이에 감동어린 글귀로 혼란지색에 빠진 영해부를 술렁이게 했던 천재 소년이기에- 천부적인 명민함을 갖고 태어난 이시형은 양반의 아들이면서 한창 벼슬길에 들어설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효성심이 지극했던 천재 문인, 이시형- 그의 한 스민 생이 소박한 기운으로 인량리에 남아 그 옛날 나지막한 담장 밑에 쪼그린 채 글을 쓰던 천재소년 이시형을 떠올리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당 우편으로는 시원하고 경치좋은 우계정이 자릴 잡고 있다. 우계정은 우계 이시형 선생이 공부했던 곳으로 지금은 마을 어르신들의 주요 담소정이 되고 있다. 소박하긴 하지만 마당 넓고 안온한 집, 따스한 기운이 느껴져 그 사연마저 궁금해지는 집, 큰 집 충효당의 비호아래 차남의 집다운 평온함으로 기억되는 집. 나지막한 담장너머로 그리운 고향의 할머니가 반겨 맞아 줄 품의 우계종택이다.

우계종택의 종부 김기섭(65) 씨는 13대조 할머니가 남편을 잃은 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았다고 했다.

③ 세조의 핍박을 피해 입향한 안동 권씨 오봉종택(五峯宗宅)

단종이 억울한 죽임으로 세상을 뜨자 어린 아들 권책은 왕암바위 앞에 가 사흘낮밤을 통곡하였다. 그의 충혼에 하늘도 감복하였는지, 입향 한 이 터 위에서 안동권씨 가문은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 대열에 올랐다.

조선 단종(1452~1455)의 신하이자,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에게 화를 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오봉 권책(단종의 외6촌)이 유배되었던 안동권씨 입향 종택이다.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던 권책은 일족을 멸하라는 세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15세 이하라는 이유로 참형만을 면하고 귀양에 보내졌다. 힘들게 목숨만은 건졌지만 생면부지의 땅에 유배돼온 13세 어린소년 권책은 원통하고도 쓰린 역사 속을 헤짚고 나와 안동권씨 인량리에 종가를 일구어 낸다. 그것이 바로 1450년 안동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인 오봉 권책선생이 거주하던 안동권씨 오봉종택인 것이다.

단종이 억울한 죽임으로 세상을 뜨자 그를 보필했던 권자신의 어린 아들 권책은 왕암바위 앞에서 사흘낮밤을 식음을 전폐한 채 통곡하였다 한다. 그의 충혼이 하늘에 닿았는지, 입향한 이 터가 성했던지 그후 안동권씨 가문은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을 형성하였다. 원래 인량 1리에 위치했었으나 화재로 불타 없어진 후에 인량 2리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멋진 풍채로 복원된 것.

조선중기의 대표적 가옥 형태인 튼 ㅁ자형의 간략한 모습으로 정자와 사랑채,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고, 지붕은 화려한 장식의 팔작지붕으로 조선 중기 전통가옥 형태를 보인다. 인량리 가운데서도 특히 돋보이는 미려한 고택의 자태, 오봉종택이다.

화려한 건물 하나하나에 조상의 얼이 깃들 듯 장인의 정신으로 한땀 한땀 수놓아진 시대적인 건축미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손꼽힌다.

④ 삼벽당(三碧堂): 영천이씨 하연공파 종택

70세 때 90대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 일화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의 아들로 조선 중기 영해 부사였던 이중량의 종택이다.

벽오동나무는 옛날 봉황이 찾아든다는 나무다. 껍질까지 푸른색을 띄어 특이한 벽오동 이야기에 쌓인 삼벽당은 과연 푸르름 속의 넓은 터가 되고 있었다.

특히나 꿋꿋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나타내는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구나 싶었더니 과연~ 삼벽당은 농암 이현보의 넷째 아들이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영천이씨 이중량의 종택이였다. 인량리 뒷산아래 고즈넉이 앉아있는 삼벽당- 어찌보면 인량리에서 가장 유명한 집일런지 모른다. 매스컴에서 유명세를 탄 적이 있는데다 지금까지 드물게도 인량리 유일의 한옥 민박집이자, 제대로 된 전통체험집이기 때문이다.

삼벽당에 들어서자면 아기자기한 한 채의 들꽃가족들이 먼저 맞이해 준다.

넓은 터가 특히나 눈에 들어오는 곳. 삼벽(석 三에 푸를 碧). 세 가지의 푸르름이 있는 곳 세 가지의 푸르름이 무언고 했더니 벽오동나무로도 불리는 청오동나무, 대나무, 소나무를 말했다. 예부터 사대부의 종가집에는 어김없이 자라고 있었던 대나무는 그렇다치고 소나무까지 있는 집은 드물 법한데, 여긴 나무들의 푸르름이 좀 유별난가 보다. 특히 벽오동나무는 그 옛날 봉황이 찾아드는 나무로 여겨졌었다. 껍질까지 푸른색을 띄어 특이한 벽오동 이야기와 함께 삼벽당을 둘러보자니 과연 푸르름 속에 쌓인 넓은 터가 이색적이긴 하다.

특히나 꿋꿋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나타내는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구나 하였더니 과연 삼벽당은 농암 이현보의 넷째 아들이자, 조선중기 강원도 관찰사(영해부사)를 지낸 영천이씨 하연공파 이중량(1504~1582)의 종택이다.

농암 이현보하면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시기 활약한 사대부관료의 본보기로서, 대시인이자 대효자로 추앙받았던 인물이 아닌가. 그 옛날 폭군이었던 연산군 앞에서도 당당히 직언을 고하고, 오랜 유배생활 속에서도 특유의 청빈함으로 강호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껴 스스로가 지방관료직을 택했던 청렴함의 대명사 이현보가 그의 아버지였으니...

지금 삼벽당은 가장 자연과 하나 되어 푸르름이 가득찬 넓은 집, 인량리에서도 손꼽히는 터라 한옥 민박을 찾아드는 외부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천연염색가 박미군씨의 관리로, 한옥민박을 하면서 천연염색 체험을 전문가를 통해 직접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2010년 전국 대학생들의 '대학생 MT페스티벌'행사에서 쌓은 전통의 돌담도 눈여겨 볼만하다.

사당(좌측)과 별채, 정자(맨앞), 사랑채로 구성된 삼벽당은 사랑채에 사랑마루가 설치된 ㅁ자형 구조로 특히 정교한 치목수법이 돋보이는 삼벽당은 동북쪽으로 인량리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함으로 더 큰 명예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는 농암 이현보, 그의 서정어린 운율 또한 자손의 고택에 녹아 흐르는 듯한 삼벽당이다.

특징은 본체 대청의 배면 창호에 설주 홈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고, 몸체 우측 익랑의 문얼굴에서도 고식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각 기둥에도 민흘림 처리가 돼 있는 등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⑤ 용암종택: 500여년을 거슬러 오른 조선중기의 소박한 아우라.

멋진 풍채로 흐느러진 배롱나무가 처마담을 둘러싸듯이 하늘 향해 팔벌린 모습이 이채롭다. 지킬 것이 많은 뿌리 깊은 유교 사대부가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느라 저런 예술적 자태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좌측으로 뻗어난 세 개의 큰 가지는 사랑채를 가려주는 듯, 몰래 훔쳐보는 듯도 하다.

인량1리에 위치해 있는 용암종택은 선산김씨 문중의 용암 김익중선생의 종택이다. 그 옛날 천석군의 집이였다 한다. 문간채를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오면 맨 먼저 정면으로 차면담이 보인다. 그리고 멋진 풍채로 흐느러진 배롱나무가 차면담을 둘러싸듯이 하늘 향해 팔 벌린 모습이 이채롭다. 일부러 그리 가꾸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처마담과 배롱나무의 조화란... 아마 지킬 것이 많은 뿌리 깊은 유교 사대부가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느라 저런 예술적 자태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언뜻 보면 좌측으로 뻗어난 세 개의 큰 가지는 사랑채를 가려주는 듯도 하도 몰래 훔쳐보는 듯도 하다. 사랑채에 누가 들었나 엿보고 싶은 안채의 마음을 진득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좌측이 사랑채요 우측이 안채인데, 그 가운데를 나지막한 차면담이 가리고 있다. 지금은 세월에 묻히고 풀과 담쟁이들에 가려 쉽게 식별이 안 되는 차면담. 과연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이 차면담의 용도가 무언가 싶었더니 조선중기 엄격했던 양반 사대부가의 상징이였다. 사랑채로 향하는 발길과 안채로 향하는 발길을 엄격히 구분하기 위한 '내외담'이였던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유교관념아래 또한 안채와 사랑채의 시야가 서로 넘나들지 않도록 아예 담으로 떡하니 막아 조치해놓은 것이다.

또한 입구 쪽에서 보면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용마루 높이도 확연히 다르다. 사랑채가 안채보다 우월히 높다. 조선중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이고도 상징적인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용암종택이다. 또한 인량리마을에 전체적으로 골고루 분사돼 있는 '배롱나무' 또한 마치 무언가의 상징을 담고 있듯 종가집엔 예부터 거의 예외 없이 심겨져 있어다 하니 이 또한 특이하지 않은가. 아마 지진이나 바람 등 오랜 세월 집을 잘 지켜주는 수호신같은 나무가 혹 이 배롱나무(백일홍으로 통칭되는)가 아닐까

인량리는 온통 이 배롱나무 천지다. 근데 그 규모가 부러 포장을 하려해도 힘들 만큼이다. 인량리로 오는 길도 배롱나무가 간지럼 타듯 흔들리며 꽃으로 환영인사를 건네고 있었는데.. 인양마을 앞에 나와서 보면 좌측을 담당하고 있는 자그마한 동산이 과거 이 배롱나무의 붉은 꽃으로 뒤 덮여 붉은 천지를 연출했었다 한다. 배롱나무의 어여쁜 자태로 귀히 여겨 조경수로 인기가 높아지자, 하나둘 베여져나가 지금은 어디에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인량리하면 상징적으로 붉은 꽃 산을 이뤘었는데 얘기만으로도 아쉬움이 배롱나무의 색깔마냥 붉어진다.

인량 1리의 용암종택은 조선시대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선산김씨 용암 김익중의 이 집은 영조 4년(1728년)에 지어졌으며 실제로 그가 살았다 한다. 정남향의 ㅁ자형 건물로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칸등이 소박하게 지어진 조선 중기의 건축 형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귀하게도 500여년의 세월을 잘 견뎌내고 있는 고마운 원형 종택이다. 김익중은 영조4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콩을 세워 양무원공신록을 지냈으며, 이후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까지 올랐다 한다. 미조항과 우수영의 진관을 역임했다.

눈에 띄는 내외담이며, 서로 다르게 지어진 용마루지붕이며, 옛 형태 그대로의 부엌 화덕이며가 예외적으로 잘 보존되어 500여년을 이어온 용암종택.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귀한 역사적 가치 때문인지 종택의 작은 귀퉁이 한켠 조차 여운으로 잦아든다.

인량리 예술제: 용암종택에서 개최되고 있는 '인량리 예술제'는 매년 주민들과 함께하는 한옥 예술제다. 한옥이라는 모티브를 이용해 대금, 아쟁(해금) 등 국악공연과 지역 아동들의 바이올린, 통기타 연주 등 지역민들이 함께하는 예술제로서 지역민과 지역아낙들이 직접 연주하는 타악 공연, 부채춤 공연 등이 돋보인다. 해마다 마을 지역특산물과 떡 등 직접 빚은 음식으로 다도(국화차 등) 시연도 포함된다. 마을순회나 투어 등을 통해 영덕 최고의 인량리마을을 알려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더욱 풍성하고 기풍어린 예술제가 되고 있다.

⑥ 갈암종택: 조선 후기 영남유학의 대표이자 영덕이 낳은 대문호, 갈암 이현일 선생의 재령이씨 입향 종택에 가다.

시대를 풍미한 학파의 거목이시자, 곧은 기개로 굽힐 줄 모르는 학자, 갈암 선생은 19가지 항목으로서 율곡 이이선생의 기호학파에 대항하며 매번 상소를 올려 '갈소'라는 칭호까지 붙은 분이셨다.

인량리에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풍채의 느티나무 일행이 우리를 맞이한다.

바로 과거 창수면을 호령했던 마을의 제일 수호신다운 기개를 반사시킨다. 그래서 이름도 팔풍정, 세 채의 아름드리다. 8요괴의 전설이 숨어있다는 팔풍정의 환대로 인량리에 들어서보니 과연 500여년 마을을 지켜온 모양새가 제대로 넓고 크다. 인량1,2,3리만 해도 초교 하나를 거느렸으며 그 가운데서도 2리가 제일 우세였다.

그중에서도 갈암종택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영덕이 낳은 시대의 대문호를 꼽을라치면 고려를 대표하는 목은 이색과 조선을 대표하는 갈암 이현일선생이시기 때문이다. 갈암(1627∼1704) 선생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손 제자였다. 조선 숙종때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조판서를 역임한 갈암 이현일선생.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전국의 후계를 통합하였기에 이황 선생의 100여년 이후 학파의 입지와 계통을 재확립시켰다. 시대를 풍미한 학파의 거목이시자, 올곧은 지조의 학자이셨던 선생은 19가지 항목으로서 율곡 이이선생의 기호학파에 대항하며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고, 올린 상소만 해도 엄청나 '갈소'라는 칭호가 붙었었다.

원래 갈암의 이 종택은 청송 광덕리에 있었는데 임하댁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어, 1992년에 갈암재실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너무도 청렴하고 깨끗해 이조 판서까지 지낸 분이 옥살이에서 풀려날 때마다 기거할 집 한칸이 여의치 않았다고 하니, 학자로서의 신념과 학문에만 일생을 바친 선생의 오롯한 정신이 귀감이 된다. 한 시대정신의 원류였던 대학자의 종택 안뜰은 너무도 소박하고 너무도 훈훈하다. 고추며 가지며 총총히 매어달린 종택의 작은 텃밭엔 후손들이 고이 지켜온 선자의 학풍과 운치가 따뜻하게 여문다.

귀양과 신원을 거듭하며 끊일 듯 이어져온 학자의 기품과 명성이 종택 곳곳에 스미어 있다. 또한 이곳 종택에서는 갈암의 8대손 이수악과, 9대손 이회발이 항일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으로 그 의미가 겹겹이 쌓여있다.

청렴하고 뜻이 높아 후세의 귀감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갈암 이현일선생. 경상은 물론, 경남, 경기를 아울러 365인의 제자를 거느린 갈암 선생의 묘소 앞에는 정재 유치명 선생이 쓴 '갈암선생 신도비'가 마을의 한 켠을 장식한 채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자운정: 운학 이함의 셋째 아들 석계 이시명이 처음 분가하여 살림난 집터. 영남학파의 거두이자 이조판서를 역임한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태실이 바로 여기다. 후세 이곳을 기념하고자 '자운정'이라 명명해 태실을 지어 보존한다. 자운정의 안주인은 최초의 여성학자이자 문인이요 예술가이자,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요리연구가인 그 유명한 정부인 안동 장씨부인이다. 영덕이 낳은 신사임당이라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부인의 넷째아들이 바로 갈암선생이시며 부인이 영덕으로 시집와 처음 분가한 곳이 바로 이곳 '자운정'으로 이곳에서 갈암선생을 낳고, 충효당에서 길렀다 한다.

⑦ 만괴헌: 나라가 내린이름,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평산신씨 종가집, 신부잣집이야기

과연 자신이 섬기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불살랐던 려말~선초의 대표적 인물 신숭겸장군의 후손이자 충효 사상의 맥을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인량리에도 그 옛날 천석군의 집으로 통하던 곳이 두 집 있었다 한다. 선산 김씨 용암종택과 바로 이곳 만괴헌이다. 영해의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만괴헌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걸맞도록 지여져, 앞으로는 태백산맥의 지류 송천이, 뒤로는 영덕의 대표 칠보산이 자릴잡고 있으며 인량리에선 좌측의 최고지 충효당과 함께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호령하듯 자릴 잡고 앉아있다.

평산 신씨 종가집으로 신부잣집으로 통했던 만괴헌- 천석, 만석의 곡식이 넘쳐난 신부잣집 곳간엔 아무리 거센 흉년에도 곡식이 모자라는 법이 없었고, 일꾼들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마을할 것 없이 한두집씩 존재했었던 천석꾼 집이 왜 이토록 유명해졌을까 하니 인조 원년, 정확히 1816(병자)-1817(정축)년 두 해의 거듭된 흉년에 나라에 기근이 참으로 심했는데 이 신 부자- 당시의 신재수 공이 만석의 자기 곳간을 활짝 열고는 기아에 허덕이는 마을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구휼했다고 한다. 이렇게 흉년에 많은 시혜를 베푼 공으로 1837년 나라에서 가의부위를 특사 받았으며, 만괴(晩槐)라는 당호도 하사받았다고 한다.

신부자의 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부터 부자일수록 자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했던 것이 거반 우리네 양반들의 모습이었을 텐데 신부자는 달랐다. 1838년에는 영해향교의 태화루와 영해읍 성문을 개수하여 향내의 교육 진흥과 읍치의 방호에 크게 보탬을 주었고, 요즘으로 치자면 마을 양로원 같은 양로소도 설치하여 어른들의 친목을 도모하였는데, 무릇 효와 경로사상이 모든 덕행의 근본임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의 선을 통해 미풍양속을 고양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지역에 헌납함으로써 많은 칭송과 예후를 받았던 신부자, 신재수 공이었다.

이는 과연 자신이 섬기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불살랐던 려말~선초의 대표적 인물 신숭겸장군의 후손이다 싶으면서도 또 그와 사상의 맥락은 같이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가 그 중함을 알면서도 몸으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덕목인 충과 효일진대.

조선 후기에 최초 건축한 이 집을 현종9년에 신재수공이 한번, 또 그의 손자 신의영이 또 한번 개축했다는 만괴헌- 과연 만괴헌은 베풂의 미덕이 살아있는 집으로 그 어떤 곳보다 따스한 정기가 흐르는 듯하다.

날아가는 봉새의 오른쪽 날개 형상을 한 뒷산- 인량 대산을 배경으로 하고 고래산을 안산(案山)으로 하고있는 인량리 넓은 대지 위의 최고지에 안채, 사랑채, 대문채, 좌우행랑채 등을 아우르며 지어진 만괴헌- 맞배지붕에, 안채 양 측면은 눈썹지붕 형으로 합각부가 이루어져 있고 좌우행랑채는 팔작지붕으로 건조된 기와집이다. 전체 구조는 ㅁ자형 평면에 양쪽으로 한칸씩 날개를 달고 있으며, 좌측에는 사랑채를, 우측모서리 부근에 방앗간도 지어놓았다.

또한 대문 칸 앞에는 가리게 담장을 설치하여 외부에서 정침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안방 뒷부분의 도장방과 툇간 등을 보자면 그 시대 지방의 ㅁ자형 주택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사랑채 쪽의 독립성이 돋보여 '조선 후기 가옥 변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또 가옥 우측을 거나한 풍채로 지키고 있는 만괴정 역시 신재수 공의 아호를 다서 건립한 정자로, 이것은 겹처마 팔작형태 기와집이다.

충의 대명사 신숭겸장군과 효의 실천가 신재수 공의 가문, 평산신씨 문중의 종택 뜨락에서 숙연해진 감흥에 쌓여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⑧ 강파헌정침: 청백리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강파 권상임의 섬세한 살림집 엿보다.

왜 소중한 고택은 항상 전소되고 소실되어졌을까?

일제와 6.25를 겪으며 특히 우리고유의 정신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외세의 만행으로 나라의 많은 문화재와 함께 가치 있는 고택들이 연이어 소실된 안타까운 역사의 일면을 상기시키게 한다.

인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인 안동 권씨 종택. 그 오봉종택 동쪽 편에 자리 잡고 있는 강파헌정침은 오봉종택에서 분가하여 나온 안동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문중이다. 안동권씨 문중은 13세의 권책(權策)이 단종애사에 연루돼 이곳으로 피신해 온 이후 약 400년간 이곳에 살아오고 있다.

이 집의 주인 강파 권상임(權尙任)은 조선 후기(현종~숙종)의 문신·학자로 인량리에서 출생하였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때 군수와 판교를 지냈다.

학식이 높고 덕망이 준수했던 그는 평생을 애민과 수신, 치기에 힘을 썻고, 외지에서는 덕행으로 군민들의 칭송을 들었고, 조정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인품은 '청백리'로 고귀하고 흠잡을 데 없는 높은 소양의 군자, 강파 권상임.

그의 호를 딴 강파헌정침인 이곳_ 정침은 주로 일을 보는 장소로, 권상임공이 직접 세운 살림집이다. 최초 ㅁ자형이었으나 사랑채가 화재로 소실된 후 안채 앞면 왼쪽에 다시 지어 지ㄷ자형 평면 구조를 보인다. 안방은 곡식 등의 수납을 위한 공간인 도장방을 가지고 있다고 대청마루는 쌍여닫이문을 2개씩을 설치하여 여름은 물론 겨울의 실내온도조절 기능까지 고려하였다.

용암종택과 같이, 사랑방 앞면 오른쪽 벽면을 따라 토담을 설치하여 손님들이 안채로 시선을 향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고, 가옥의 내·외부 공간도 분리시켰다. 17세기 후기에 건물로 경상북도 동북부지역의 주택 형태를 보여준다. 왜 소중한 고택은 항상 전소되고 소실되어졌을까? 일제와 6.25를 겪으며 특히 우리고유의 정신문화를 말살시키고자 한 외세의 만행으로 나라의 많은 문화재와 함께 가치 높은 고택들이 많이 불타 없어졌던 안타까운 역사의 일면을 상기시키게 한다.

강파헌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주위에 담을 두르고 정면에 출입구를 두었으나 대문은 두지 않았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방을 각각 놓았다. 사랑채는 원래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정면의 구분이 약하며 사랑채가 서향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지족당: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지족당 권만두(1674∼1753)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선생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병과에 급제한 뒤 공조정랑이 되고 사관으로서 경연관을 겸했다. 지족당의 구조는 앞면 7칸·옆면 5칸의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서책 및 각종 유품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지고 지금은 『장수공문집』과 지족당만 남아 있다(인량5길 49-12)

정려비(각): 임진왜란 시 전라도 김제군수로 재직중 웅치를 방어하다 장렬히 전사한 정담장군의 정려비로 숙종 16년(1690)에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다(인량리 255-1)

2. 영덕 남호리 석탑/석불

용도를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석물이 있다.

3. 화수루, 까치구멍집, 청간정

① 화수루: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숙종(재위 1674∼1720)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이 지어졌는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화수루와 청간정(聽澗亭)만 남았다. 화수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의 누마루 집으로 양쪽 1칸씩은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만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소박한 꾸밈새로 고건축물의 중후함이 엿보인다. 현재 주위는 민가와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뒤쪽 낮은 언덕에 오래된 무덤 1기가 있는데 이 누각에 딸린 것으로 보인다.

화수루는 조선후기 숙종 19년에 지어진 2층 누각(정면5층, 측면2칸)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에 지정되었다가 2009년 다시 중요민속자료로 승격 지정되었다. 한 번의 전소를 겪고 십여 년 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건립과 재건 년도가 크게 차이나지 않아 조선 후기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ㅁ자 평면의 재사인데, 재사란 가문의 일을 의논하거나 자제들이 학업과 수양을 닦을 때 머무는 서재 형태의 기능을 하는 집이기에 모름지기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한적한 은거처로 자리 잡아 짓는 것이 풍습이었다 한다.

집안의 형태는 안쪽으로만 트인 건물 형태로, 앞에서는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파악할 수 없도록 한 것이 외부에 대한 가문의 폐쇄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영덕에도 인량리와 괴시리, 조선시대 성립된 두 개의 큰 마을이 있지만 이러한 재사의 형태는 극히 드문 것이, 재사를 따로 두기위해선 상당한 가문의 위력(명망과 경제력에서 두루두루)이 뒷받침 되어야만 했다 한다. 그 시절 나라를 들썩였던 권문세도가 안동권씨 집안이었기에 가능했을 법한 이야기다. 안동에도 재사가 별도로 있었으니, 종택이 있는 영덕에도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당시의 세력의 우세함을 가히 짐작할 만한 부분이다.

영덕에 처음 안동권씨가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알려진 바 대로 조선 6대 단종 임금의 외숙부이자 현덕왕후(문종의 비)의 아우인 권자신이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 화를 당하고, 그의 아들 오봉 권책이 이곳에 유배되어 오면서 부터였다. 권책의 증손인 권희언은 특히 선조의 뜻을 받들어 교민정화에 일생을 바쳐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아들 5형제가 이를 추모하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운 누각이라 전해진다. 이후 자손이 더욱 번창하고 가문이 융성해진 안동권씨 문중은 조선후기부터 영덕의 주요 집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② 까치구멍집: 화수루 옆에 동그마니 세트로 지여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작은 초가집. 그것은 고(庫)지기 까치구멍집이다. 화수루에 머무는 양반들을 보필하기 위해 시중드는 이가 살도록 지어놓은 집으로 산간지방에 걸맞도록 보온이 잘되는 겹집 형태로 지어졌다. 마당이 따로 없으며 방과 방이 붙어 이어지는, 굳이 따지자면 田자 형태의 평민 집이다.

'까치구멍집'이란 이름은 집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구멍이 나 있어서 붙게 된 것 같다. 폐쇄적인 겹집 형태이다 보니 겨울 난방 시에 연기가 나갈 수 있도록 구멍이 필요했고, 굴뚝과 비슷한 용도로 까치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단 비가 샐 것을 대비해 초가를 이를 때 구멍위쪽을 덮듯이 올려 세워 비가 흘러들지 않도록 채비는 해두었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나란히 있었던 따뜻한 풍경의 까치구멍집이 오히려 팔작지붕 화수루 보다도 정겹게 다가온다.

화수루와 까치구멍집은 400여년 이상을 버텨올 만큼 아주 견고하게 지어졌다. 외진 산골에 터를 잡았기에 인적과 세월의 손때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기 때문일까. 이리 오래 동안 그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비결은... 지금도 이곳은 인가가 드물어 고즈넉한 두 채의 집만이 덩그러니 오랜 외로움을 견디며 힘겹게 서있다.

4. 영덕 관음사

① 불상: 후대에 조성 복원 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혼란스러운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석불좌상과 좌대가 있으며, 좌대는 현재 뒤집혀져 있는 하대석 중 상대석과 중대석 그리고 중대석 위에 올려 진 괴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안상 상대석 괴임으로 보이지만, 별석의 괴임이라면 중대석 괴임도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중대석과 일석으로 치석되어 있어 확실한 상대 괴임석으로 증명되고 있다.

안동 마애석조비로자나불 좌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대좌 상대석 괴임돌의 양식이 안동과 가까운 이곳 영덕에서도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양식이든 후대로 오롯이 그대로 승계가 이어지지 결코 사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례라고 볼 수 있다.

영덕 관음사 석불좌상의 상대 괴임석은 11세기 초반 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마애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의 상대 괴임석 조각 수법보다 후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동 마애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의 상대 괴임석은 중대석과 별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중대석 별석 조각 수법이 공력이 깃든 깊은 돋을새김으로 새겼으며 특히 공양상의 표대까지도 표현하는 우수한 조각 기법이 보이지만, 그와 달리 영덕 관음사 석불좌상 상대 괴임석은 중대석과 일석으로 치석되어 간략화가 진행된 모습이며 중대석 공양상의 조각 수법이 세밀하지 못해 안동 마애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의 상대 괴임석보다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② 광배: 골이 깊은 조각 기법으로 특히나 합장한 삼존불이 눈에 띈다.

5. 장육사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산불로 인해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절을 세웠으나 임진왜란(1592) 때 훼손되어 다시 절을 세웠다. 광무 4년(1900)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한편 대웅전 내에는 영덕 장육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 모셔져 있다.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한데, 특히 사천장의 주악비천상과 좌우벽의 보살상벽화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① 장육사 건칠보살좌상: 영덕군 장육사에 있는 높이 86㎝의 조선 초기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것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원문과 改金墨書銘(개금묵서명)을 통해 홍무 28년(태조 4년, 1395)에 영해부의 관리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주로 만들었고, 영락 5년(태종 7년, 1407)에 다시 금칠하였음이 밝혀졌다. 얼굴은 사각형인데 눈이 치켜 올라갔고 코도 날카로우며 표정이 완고하다. 상체는 앞으로 깊게 숙였지만 비교적 건장한 편인데 사각형이면서도 어깨가 자연스럽고 가슴의 양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역시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14세기 초의 보살상에 비해 장식성이 더욱 강조되어 가슴의 목걸이 이외에 소매, 배, 다리에까지 구슬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번잡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가슴을 트이게 하고 가슴에는 속옷과 바지의 매듭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이후에 만들어진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상(1447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청동보살좌상(1516년)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서 고려말 조선초 보살상들의 연대 추정에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② 장육사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장육사 대웅전 본존불 우측 내벽에 모셔진 탱화다. 지장보살은 인도의 토신에서 유래한 보살이고, 땅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이처럼 지장보살도 모든 죽은 사람들의 죄를 구제하고, 지옥에 떨어져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안락한 정토나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중앙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비구 형상으로 삭발을 하고 있고, 손에 지물로는 석장과 투명한 보주를 지니고, 천의 대신 가사를 입고 있으며 결가부좌하고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명부시왕과 판관, 녹사 등의 권속을 표현하였다. 상단에는 이부동자와 보살을 묘사하고 있다.

③ 장육사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畵): 장육사대웅전 내에 삼존불 후면에 걸리는 후불탱화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ž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본존 석가불이 중상단부 위치하고 있고, 그 양옆으로 4천왕, 10보살과 10대제자, 4분신불, 구름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중들이 본존불을 중심으로 사다리꼴로 배치되고 있으며, 그리고 좌대 하단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좌우에 각기 묘사되어 있으며, 둘레에는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석가불의 머리에는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뚜렷하며,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왼쪽어깨에만 옷을 걸쳤으며, 원형의 광배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어서 불상과 잘 조화되고 있다.

사가라용왕

용은 상상의 동물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4대 영물 중 하나이다. 동서양 모두 뱀을 원형으로 하여 다른 동물을 혼합시킨 모습이다. 용왕은 용신·용왕할머니·수신이라고도 하며, 특히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하여 예로부터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음력 6월 15일에 지내는 용신제나 용왕굿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이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나가 되었다.

인도에는 용을 천궁을 수호하는 용, 비를 부르는 용, 지룡(地龍)과 회륜전왕(回輪轉王)의 대복팔장(大福八藏)을 관장하는 용으로 분류한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용은 선악 양면을 보여준다. 선룡은 모두 팔용으로 난타·발난타·사가라·화수길·덕차가·아나바달다·마나사·우발라이다. 이들은 불법을 수호하고 비를 내리게 하여 풍년을 이뤄준다고 한다. 특히 바다용왕인 사가라는 기우의 본존이다. 난타와 발난타는 석가가 강탄할 때 청정수를 토하여 부처의 몸을 씻었다고 하는 선룡이다.

남순동자

남순동자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근거하여 관음도의 오른쪽 아래에 합장하고 서 있다.

일찌기 남행하여 53위의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문수·보현보살을 만나 불도를 이룬다.

동자는 동아, 동진, 동남이라고도 하는데 보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20세 미만의 스님이 되고자 하는 어린 아이를 일컫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동자상이 많이 조성된 이유는 동자의 해맑은 미소와 순수함이 부처님의 마음과 같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남순동자는 일찍이 문수보살의 안내를 받아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남방의 모든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고, 마침내 보현보살을 만나 십대원을 들은 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불도를 이룬다.

남순동자라는 이름은 남행하여 53명의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원통전)에서 해상용왕과 함께 관음보살을 양 옆에서 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각상을 하지 않고 후불탱화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 제39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동자의 모습이다. 반적으로 쌍꼭지 머리를 하며, 옷주름을 낸 음각선이 깊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얼굴과 어깨는 둥글고 안정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동자상은 보통 형태에 있어서는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형태, 머리를 늘어뜨린 형태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천상: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아름다운 선녀

비천상은 주로 범종에서 볼 수 있으나 때로는 석등, 부도 불단이나 단청의 별지화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교의 천국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면서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 찬탄하는 천인의 일종이다.

비천(춤추고 노래하는 인도신화의 괴물)은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건달바와 긴나라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향만을 구하여 몸을 보호하며, 스스로 몸에서 향기를 발산하므로 향음신이라고도 하며 속악을 연주하는데 이 건달바가 불교 성립과 함께 팔부중의 하나로 교화되어 하늘의 가신歌神으로 자리 잡게 되다.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 부터 동쪽으로 옮겨 중국에 전래된 때 비천도 그 뒤를 따라 유입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둔황석굴의 벽화를 보면 비천과 중국신선들이 한 화면에 동시에 등장하고 불교의 제석천(우주관의 중심산인 수미산 정상부에 있는 도리천의 제왕,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보호한다)에 비견되는 동왕공과 그의 妃서왕모를 호위하는 비천이 불교사상과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이 병존하는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육사 비천상은 각기 당비파와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천의를 길게 늘어뜨리며 하늘에서 비스듬히 하강하는 내려오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벽화

문수보살 동자상: 토벽채색의 벽화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로 주로 법왕자, 즉 동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문수사리법왕자라고도 한다. 해태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가 그려졌는데, 오른손으로 여의(如意)를 잡고 있다. 형상은 보살이 아니라 머리를 양 쪽으로 묶은 동자형으로 표현되었으며 몸에는 천의(天衣)를 걸쳐 막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천의자락이 휘날리고 있다. 그 좌우로 상서로운 구름문이 묘사되었으며 상단 향 좌측에 명호가 쓰여 있다. 조선후기 作으로 보인다.

보현보살 동자상: 흙벽위에 채색하였다. 흙벽면 전체를 연녹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벽면의 중앙을 꽉 채운 큰 코끼리 위에 타고 유희좌로 앉아 양손으로 연꽃을 받쳐 잡고 있는 모습이다. 문수동자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쌍계머리를 하고 천의를 걸쳤으며 유희좌로 여유롭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육아백상의 큰 코끼리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그려졌고, 그 주위로 구름문이 문수동자의 하강을 상서롭게 표현하고 있다. 문수동자가 향하는 앞쪽 여백에 ‘보현명연기(普賢明緣起)’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 作으로 보인다.

사찰의 목조건축 세부 부위에 각각 다른 문양의 채색을 하는 단청은 건조물의 조화미를 돋보이게 할뿐 아니라 목재에 채색을 가함으로써 방충의 효과도 가져와 내구성을 충실하게 해준다는 기능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 벽화는 장육사 대웅전 천장의 별지화로 그려진 주악비천(奏樂飛天)이다. 이러한 별지화는 사찰건축의 창방이나 도리 등 큰 부재를 제외한 공백에다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장식화로, 대개 회화적인 수법을 지니지만 주로 소재는 불교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조선 후기작으로 판벽채색으로 보인다.

나옹선사 선시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7. 석상과 마애불상

문봉산 기슭 계곡 건너편에 미륵불상과 마애불상이 같은 바위에 나란히 서있다.

계곡 맞은편에 축대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불상을 모셨던 절터로 추정된다.

석상은 미륵불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세부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그 형태로 보아 불상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석인상으로 생각된다.

8. 영리 미륵불

병곡면 영3리 미륵골 마을 입구에 위치한 사당 안에 있던 미륵불이 2008년 9월 17일 사라졌다 20여일 만에 다시 찾았다고 한다.

영덕 영리 사당 침입 훔쳐가

영덕판 '옹박'사건이 벌어졌다. 영덕 병곡면 영3리(속칭 미륵골) 33가구 주민 73명은 지난달 30일 마을 입구에 위치한 사당 안에 있던 석상 미륵불(사진)이 사라졌다고 신고했다. 오지 마을 주민들이 수백년간 수호신으로 여겨온 '미륵불'이다.

이 마을 송정복(65) 이장은 "평소 사당문을 자물쇠로 잠가 외지인의 접근을 막아 온 '마을의 성역'인데 6cm 깊이의 바닥에 봉해놓은 불상을 누군가가 파헤쳐갔다"고 한숨을 지었다. 높이 127cm, 어깨 폭 60cm 크기의 이 미륵불은 조선 숙종 15년(1689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넓은 얼굴에 큰 코와 콧수염이 특이하고 앞가슴에 양손을 모으고 손에 팔주령과 비슷한 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

이 미륵불은 300여 년 간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으로 여겨지면서 마을 이름도 미륵골로 불릴 만큼 마을 주민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았고, 정월 대보름을 포함해 연간 두 차례 마을 동제를 지내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외지 방문객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사건 현장을 확인한 결과 미륵불은 사당 위치가 영덕에서도 군도와 산길 비포장 도로 1.5km를 통과해야 하는 오지여서 수차례 현장 답사를 거친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보였다.

김상현(42) 영덕군 학예사는 "미륵불의 모양이 특이해 밀거래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영리 주민들의 심적 공허감을 해소하기 위해 모조 미륵불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매일신문/ 영덕·박진홍기자 2008.9.17>

◇옹박= 태국 북쪽 오지 마을에서 수백년간 수호신으로 모신 불상머리를 도난 당하자, 주인공이 이를 되찾기 위해 방콕의 문화재 국제밀매조직을 찾아가 싸움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수년전 국내에서 인기를 끈 영화.

18일 경북 영덕군 병곡면 영3리(미륵골) 마을 제당에 봉안된 석조 "미륵불" 도난 사고가 발생해 1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건 영덕군과 경찰이 미륵불 행방을 찾고 있다.

도난당한 미륵불은 높이 127㎝, 어깨 폭 60㎝로 등에는 성혈과 같은 구멍들이 종과 횡으로 일정한 열을 이루며 8개 정도가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종으로 황수종립석(黃守宗立石)과 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 숙종15년(1689년)의 문구가 각자돼 있다.

[영덕] 속보= 도난당했던 영덕군 병곡면 영3리 마을 수호신 석조 미륵불이 20여일만에 다시 주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영덕군은 이 마을 제당에 봉안됐다 사라진 미륵불이 지난 19일 예천군 용문면 도로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군청 문화재 관계자는 "미륵불을 되찾기 위해 군이 포상금까지 내걸고 전국을 대상으로 수배를 벌이자 절도범이 보관 및 처분에 부담을 느껴미륵불을 도로에 버리고 경찰에 알린 뒤 달아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영3리 속칭 미륵골 주민들은 "잃어버린 미륵불이 되돌아와 천만다행"이라며 "이제는 도난 재발방지에 주민 모두가 힘을 모아 잘 보살피겠다"고 말했다.

미륵골 傳統文化 由來

우리마을은 新羅진흥왕때 太白山脈의 젖줄인 일곱가지보배를 지닌 七寶山 한기슭에

自然景觀이 아름다운 명당에 落落長松과 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신라바위폭포수

四季節을 유유히 지켜주는 맑은 碧溪水가 東海를 向하여 흐르며

후손의 希望을 가득 실어주는 太平洋을 바라보는 東海바다 또한 風水地理說에 依하면

左靑龍右白虎 사이에 金鷄抱卵形局으로 背山得水자리에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이조중엽 숙종 15년도(강희 28) 지중에 매몰된 석불이 黃宗守이란 사람에게 현몽되어

이곳 명당의 자리에 미륵석불을 모시고 미륵당을 건립하였다.

미륵당의 4개 기둥은 소나무 싸리나무 칡기기둥 돌기둥으로

소나무는 四時長靑 푸른 氣象을 뜻하며 千年萬年壽命이 길며

싸리기둥은 衣食住와 富貴榮華하며

칡기기둥은 隣保相助로 인정 있게 살며

돌기둥은 千萬年不變하는 뜻이다.

4개 기둥은 仁義禮智의 뜻으로 미륵골로 호칭하였다. 그 후 동신당으로 모시고 있으며

금세는 선량한 百姓이라하여 살기좋고 인심좋은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되어

군에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한편 객지로 나간 후손들은 삼천리 방방곡곡 꽃을 피우니

미륵부처님의 慈悲心으로 온누리에 永遠히 뿌리내릴 仁義禮智의 그 뜻을 높이

찬양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후손은 傳統由來記念碑를 세운다.

西紀一九九六年 九月 日

주최 : 미륵골향우회일동 후원 : 노인회일동

현재 미륵당이 있는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이 사찰이 폐사가 된 이후 마을사람이 현몽하여 땅에 매몰되어 있던 미륵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내 당을 지어 모시게 되었다고 마을주민 남완식씨(남, 58세)는 전해준다. 전통문화 기념비에서도 역시 비슷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기둥에 얽힌 이야기이다. 건물의 주요한 틀을 이루는 4개의 기둥을 각각 다른 기둥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둥들은 제각기 의미들을 담고 있으며, 이 네 기둥이 모여 인의예지를 세운다고 전한다.

미륵당에 모셔진 미륵불은 일반적인 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석장승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민간 미륵불 형식은 일반적인 것이지만, 가슴에 새겨져 있는 손에 든 꽃모양의 형상은 좀처럼 보기 힘든 양식이다. 그래서 미륵골의 미륵은 어느 시대 무슨 양식이라고 쉽게 단언하기 힘든 모습인 것이다.

현몽을 통해 폐사지에 매몰된 미륵을 발견했을 당시에 마을주민들의 놀라움과 미륵의 신성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특수한 동신을 모시는 것이기에 당집의 건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네 기둥의 재료나 의미부여뿐만 아니라 지붕의 두터운 단아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속신앙과 결합된 부처의 넉넉한 자비를 느끼게 한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동제를 모시고 있다. 매년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경(子時)에 깨끗한 인물로 선정된 제관들이 마을을 대표하여 경건한 제의를 올리는 것이다. 또한 많은 마을사람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에도 미륵당을 찾는다고 한다. 게다가 마을을 들고 날 때도 역시 미륵당에 인사하며 떠나는 길에 가호를 빌고 돌아오는 길에 감사의 뜻을 전했을 터이다.

이는 흡사 안동에 있는 미륵불의 위상과 비슷하다. 바로 제비원 미륵불을 가리킨다. 영주로 가는 길목에 좌정해 있는 제비원 미륵불은 들고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지킴이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외지의 많은 사람들도 안동 제비원을 성주신앙의 메카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소원을 비는 것과 같이 미륵골의 미륵당에도 많은 외지인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소원을 빌고 간다고 한다.

영3리의 미륵당과 미륵불은 우리의 토속적인 무속신앙과 불교가 조화롭게 결합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또한 여전히 신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면서 살아생동하는 신화로, 자신들의 삶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바닷가의 삶과, 농작물을 함께 경작하는 농부라고 하는 그네들의 복합적이고 고난한 삶 속에서, 그들은 마침내 가슴 벅차게 다가올 미륵하생의 개벽세상을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

9. 유금사

영덕군 병곡면 칠보산 정상에 자리한 유금사는 신라시대 장화부인의 못다 이룬 슬픈 전설을 안고 있는 곳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서기637년(선덕여왕6년)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의 사찰로서 조선중기이전까지는 대웅전 종각 장화부인의 신령각 등을 갖추고 있었고 승려도 수 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느 날 유금사주지가 불국사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찰앞 용소(龍沼)에서 두 마리의 용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고약하다고 느꼈는데 절에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절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중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627년(인조5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금사가 자리한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금이 많이 생산되어 신라시대에는 나라에서 금을 채광 하였던 곳으로 금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유금사가 자리한 칠보산에는 일곱 가지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여 칠보산이라 불리어지며 신라선덕여왕의 일곱 공주가 이곳에 와 모두 출가하여 수도하다가 선화(仙化)하여 신선이 되었으므로 칠보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칠보산은 산중턱에 구름이 감돌아 산이 구름위에 솟았다하여 등운산이라고도 불리었으나 옛날 화인이라는 중국지리학자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보고는 이 산 안에는 반드시 일곱 가지 보물인 돌옷ž더덕ž산삼ž황지ž멧돼지žž철이 있으리라 예언하여 이후 칠보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각은 대웅전 뒤쪽 왼편에 위치한 건물로 신라말기의 사람으로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를 사모하던 장화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웠던 산령각 이었으며, 소실 된 후 칠성탱을 중심으로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 하고 있다, 장화부인의 전설로 유금사의 부속암자로 금선암이 있었으니 신라 말 장화부인이 마의태자를 사모하였으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 칠보산을 찾아 와 출가한 곳이다. 장화부인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축단을 설치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마의태자가 왕위에 오를 것을 늘 축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오기를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유랑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이에 장화부인은 축단 앞에서 마의태자가 극락왕생하기를 몇 날 며칠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간절히 빌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금선암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은 그녀의 일을 애통히 여겨 정성껏 장사지내고 묘도 크게 만들었으니 부인의 묘는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녀를 위한 신령각을 세웠으나 나중에 폐허가 되었고 현재의 삼성각으로 중창하였다 한다,

① 유금사삼층석탑(보물 제 674호)은 대웅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던 것을 대웅전 뒤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옮긴 시기는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형식을 보여 준다. 다만 탑 전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반전이 있는 것과 2층 기단의 갑석이 많이 돌출된 점들이 보아 신라시대 하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석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고려시대 초까지 시대를 낮추어 볼 수 있으나 앞의 배례석을 볼 때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재청 자료에도 신라시대 말에 만든 탑이라고 한다. 다른 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징 중하나가 탑신석에 체감이 있는 것이다. 탑신석에도 체감을 주어 상승감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인 비례감이 훌륭한 탑이다.

탑을 둘러보니 많이 주저 않았다. 특히 초층기단이 많이 주저앉아 보이고 2층 기단의 면석이 많이 기울어져 보수가 시급하게 보인다. 돌아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유금사 삼층석탑의 보수라는 명목으로 두 권의 보고서가 보인다. 한번은 1991년 8월에 시행된 해체보수이고 두 번째의 것은 97년도에 시행한 보고서인데 이 보고서는 유금사의 삼층석탑의 주변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요사채로 개축한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석탑과는 관계없는 것이니 실제적으로 삼층석탑을 보수한 것 1991년이다.

② 유금사석불: 목 윗부분과 손이 결실된 옛 불상의 몸체에 새로 불두와 지물을 든 손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목 부분과 손목 부위에 접합제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불상 몸체 전면은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옷주름 양식을 하였고, 무릎사이 부채꼴모양의

접힌 옷주름은 퇴화된 양식으로 보인다. 불두의 모습은 근세 이후에 만든 것으로 보여

지며 자세한 시기는 추정하기 곤란하나 조선 후기보다 늦은 일제시대 또는 그 이후

근래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

③ 유금사 부도

덕흥사

경북 영덕군 영덕읍의 덕흥사(주지 성엄스님)의 제석탱화가 2014년 01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7호로 지정됐다.

탱화는 4폭으로 엮은 한 폭의 비단바탕에 채색한 불화로 위태천과 제석천을 중심으로 주변에 총 9위의 권속으로 이뤄져 있고 하단 주색 화기에는 1828년(道光 8)에 수화사(首畵師) 금겸(錦謙)을 비롯해 5명의 보조화사가 제작했다고 기술돼 있다.

불화는 후대에 채색이 덧칠되어 있어 작품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지는 않지만 화기에 의해 원소장처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이라는 의의와 더불어 조선후기 불화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점에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