尤菴宋時烈 先生 讁居記
崇禎紀元之三十年乙卯閏五月(1675, 5, 肅宗 1年)
尤菴先生이 덕원(德源)유배지로부터 장기현(長鬐縣)으로 이배(移配)되어올 때 당시(当時) 先生의 동생 시도(時燾) ,시걸(時杰)과 부실(副室)등이 같이 왔으나 성명(姓名)은 알 수 없다. 장기에 유배 올 때 선생의 나이 69세.
선생일행이 장기현 경계지점에 도착하자 현내(縣內)의 마을 이름을 물으시고는 마산촌(馬山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선생께서 고을 이름에 기자(鬐字)가 들어있고 마을 이름에 마자(馬字)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하고 사관(舍舘)을 마산촌(馬山村)에 정하니 주인은 사인(士人) 吳道全이란 사람이다.
마산촌(馬山村)은 바다와 가까워서 바람이 심해 선생이 거처하는 방밖 처마 밑에 별도 이중벽(壁)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다니셨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놓고 해풍(海風)을 막았다.
*뜰 앞에 조그만 포전(圃田)을 만들어 놓고 한가로이 거닐며 장삽(杖鍤) 으로 시초(蒔草)와 생강을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생강과 잣을 드셨다.
*앉으실 때는 자세를 똑바로 가지셨고 포전에 나가서도 식사는 거르지 않았다.
*행단(杏壇)을 쌓아놓고 그 아래 우물을 파서 금붕어를 기르며 집 뒤쪽으로 물을 끌어 들여 산초(山椒)열매와 잎줄기가 물에 젖게 하였다.
*창밖에는 벌을 기르며 아침저녁 들여다보곤 하셨다.
*선생의 동생 전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낸 시도(時燾)와 전 순창현감(淳昌 縣監)을 지낸 시걸(時杰), 아들 찰방(察訪) 기태(基泰), 손자 한림(翰林) 주석(疇錫), 증손자 증일(曾一), 증확 (曾確) 사부(師傅) 일원(一源), 교관(敎官) 유원(有源)이 항시 자주 오갔다.
*강승석(姜承碩)은 강효원(姜孝元)의 손자이다. 강효원은 시강원(侍講院)의 벼슬을 지내다가 정축(丁丑)년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으므로 그의 손자 강승석을 선생께서 항상 어여삐 여겨 유배지까지 데리고 와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다.
*선생은 평소 허리끈을 묶지 않았으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다. 간혹 베로 만든 폭건(幅巾)을 쓰기도 하며 방갓(方冠)을 썼다. 곁에는 항시 책을 수 백 권 쌓아두고 독서를 하기도 하고 시(詩)를 읊기도 하시며 수필(水筆)로 청마루 판자에 써서 그릇에 모아 두었다.
*장기에 유배 온 후로 5 년 동안 주문차의(朱文箚疑)에 착공(着工)하시어 매일 손자 주석(疇錫)과 토론하셨다. 疇錫이 자리에 있을 때는 선생께서 초록(抄錄)을 집필하셨고 疇錫이 없을 때는 글씨를 썼다.
*모포(牟浦)에는 옛날부터 시장(市場)이 있었는데 여자 종들이 술을 팔아서 선생의 부족한 반찬을 마련해 주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계집종들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집안에서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변소를 따로 쓰게 하였으며 언제나 아랫사람(婢僕)들에게 마을과 이웃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셨다.
*영일縣 무인(武人)김씨(金氏)를 길에서 만났을 때 선생의 종놈이 그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상대방 종놈의 머리칼을 잡고 때리자 선생이 종놈의 막대기를 빼앗아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영일에 사는 金씨 무인(武人)이 선생을 알아보고는 즉시 사죄를 하더라.
*선생께서 종 놈 들에게 나쁜 짓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허물을 물으시고 다시 그 종놈을 다스렸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로 각도(各道) 관찰사(觀察使)들이 간혹 사람을 보내서 문후(問候) 할 때나 각처에서 선비들이 와서 배알(拜謁)할 때는 선생이 몸소 위리수문(圍籬水門)안에 까지 나가서 손님을 맞았으며 얘기를 나 눌 때도 수문(水門)밖에서 하였고 문(門)안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선생께서 장기유배지에 도착할 당시 장기현감. 손만웅(孫萬雄)(義城武弁)이 전혀 선생을 보살피지 않았다가 원근(遠近)에 있는 현령(縣令)들이 장기현감을 해임시켜야한다고 야단을 치고 치정(治政)이 옳지 못하다고 떠들어대자 암행어사가 내려와서 장기현감을 파직하기 위해 선생을 배알 하러 왔을 때 선생께서 장기 땅은 벽지이므로 현감을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사정해서 파면은 면하게 되었다. 그런 후로 장기현감이 선생의 고마움을 깨달아 정성껏 선생을 돌보게 되었다. 선생의 도량이 이같이 넓으셨다.
*여주(驪州)에 사는 이수장(李壽長)이 선생을 찾아와서 글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 사람과는 선생이 평소 모르는 사이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시경(詩經)과 제자서책(諸子書冊)을 4월 달 부터 9월까지 가르쳤다. 그의 아비가 자기 아들이 선생의 유배지에서 글 배우는 것을 알고는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아들이 멀리 갔다는 사실을 알렸다.
내용을 알고 보니 李壽長이 가정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지도 않고 글 배우러 온 것이다.
선생이 편지를 읽은 그 이튿날 새벽에 소학(小學) 4권을 이 수장이가 공부하는 곳에 보내니 壽長이가 곧바로 선생께 하직 인사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달뜨는 저녁이면 정원을 거닐었다. 위리(圍籬)가 오래되어 헤진 곳이 있었다. 선생께서 圍籬 헤진 곳에 다 달으면 행여 한 발짝이라도 넘어갈까 걱정하여 발길을 돌려 집주인에게 물어본다. 산책길에 혹시 圍籬를 넘어간 일이 있었느냐고 하니 주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러면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시니 유배지에서의 몸가짐을 이같이 조심하였다.
*春3월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꿩을 선생에게 갔다드리니 선생이 꿩을 만져 보시고는 지금쯤 알을 낳을 때가 되었으니 알을 품은 새를 차마 잡아먹지 못하겠다하고 다시 돌려보내니 그도 역시 산에 놓아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꿩이 새끼를 데리고 다녔다 한다.
*남쪽 지방은 학질(말라리아) 병(病)이 많았다. 이웃에서 이 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선생이 거처하시는 울타리 안에 만 들어오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떠나신 뒤에도 학질병에 걸리면 송대감(宋大監)이란 글자 3字만 써서 환자 등에 붙이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인 서유원(士人 徐惟遠)은 선생께서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 실 때까지 선생문하에 자주 드나들어 정이 두터웠다. 선생께서 “安步當車, 晩食當肉, 爲善最樂, 求利反害”라 열여섯 글자를 서유원(徐惟遠)에게 글씨를 써주니 그 집에서는 병풍을 만들어 가보(家寶)로 삼으니 읍민(邑民)들이 와서 구경하더라.
*장기 고을은 바닷가 벽지인지라 풍속이 예절에 맞지 않았다.
선생이 이곳에 유배 온 후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섣달 그믐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잘못된 풍습이라고 하시고 정월 초하루 날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장기 고을 사람들에게 크게 교훈을 베풀었다.
*선생의 집주인 오도전(吳道全)은 처음 선생이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실 때까지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많은 진도가 있어서 그 후 장기고을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해서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풍습을 고쳐 양반고을을 만들게 되었으니 선생의 가르치심이 장기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도움을 주었다.
*吳道全의 본명(本名)은 道傳이었으나 선생께서 옛날 고인(古人)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道全으로 개명했다.
*선생이 장기 유배시 마을에서 기르는 닭이 암놈이 갑자기 수탉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으시고“계(鷄)는 곧 유(酉)와 같은지라 酉는 방향으로 말하면 서쪽에 해당되니 서방이 시끄러울 징조이려나? ”하고 걱정하셨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얼마 되지 않아서 경신(庚申)년 변화가 있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장기고을 사람들이 놀라 탄복하더라.
선생이 장기에서 거제(巨濟)로 이배 시(移配時) 고양이가 세발달린 새끼를 낳았고 선생이 처음 이 고을에 도착하셨을 때는 괴목(槐木)이 가시가 돋아나고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는데 위로 나뭇가지 여덟 개가 쭉 뻗어 있었으나 선생이 거제로 이배(移配) 가실 때는 괴목(槐木)을 베어 그 나뭇가지를 쪼개어 죽교(竹轎)에 싣고 가시니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선생이 을묘년(乙卯年)에 장기현에 유배(流配)왔다가 기미년(己未年)에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기까지 5년 세월이 흘렀다.
*巨濟 移配時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내려 왔을 때에 선생께서는 모자를 쓰시고 직령(直領)을 입고 울타리 밖에서 절을 하시고 교지를 받은 후 떠나셨다.
ㅡ英祖 元年(1725.2) 記述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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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時烈 : 1607(宣祖 40) - 1689(肅宗15)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 吳道全과 6寸동생 오도종(吳道宗)이 선비들과 의논을 해서 선생의 영당(影堂)을 건립코자 대구에 있는 차용징(且龍徵), 정도원장(定道院長)이 장기현에 사는 황보헌(皇甫 憲), 이동철(李 東澈)과 함께 사당(祠堂)건립 도감(都監)을 맡아 대구에 사는 봉사(奉事) 전극화(全克和)와 상의하였다.
(전극화(全克和)는 선생 문하에 출입하던 사람이다.)
정해(丁亥)년(1707 肅宗, 33년)에 영당(影堂)을 짓기 시작하여 무자(戊子)년(1708)에 완공하여 그 이듬해인 기축(己丑)년(1709) 4월6일에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유감역(兪監役)으로부터 집을 관리토록 명(命)하였다. 丙申년(1716) 10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木主)를 원(院)에 봉안하고 이름을 죽림원(竹林院)이라 하였다.
오시좌(吳時佐)가 丁酉(1717) 辛丑(1721) 2년간에 걸쳐 사액(賜額)을 받기위해 한양에 올라가 일을 보았으며 당시 院長은 수암(遂菴)선생이었고 기타 간여한 사람과 유사(有司)까지 합하여 무려 2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원 설치(院設置)를 허락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恨)이 되고 있다. 중년에 경주진사 한시유(韓是愈), 한 장(韓章)이 선생을 추모하기위해 사당(祠堂)을 건립하려 했으나 나라에서 허용치 않아 서원(書院)을 설립치 못하고 影堂을 봉암(鳳岩)에 창건하여 竹林院에 있던 影幀을 옮겨서 봉안 하였다.
임인(壬寅)년 봄에 경주 부윤(府尹) 권세백(權世栢)이 선생 影堂을 없애 버리자 그곳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당에 들어가 선생 影幀을 구해내어 다행히 훼손은 면하게 되었다. 하늘이 말리는 일이거늘 어쩔 수 있으랴.
본원(本院)의 재산으로는 논 20斗落이 있었으나 노비가 없어서 향교에 있는 노비(奴婢) 몇 사람으로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선박(船舶) 1隻이 있었으나 나라에서 서원(書院) 철폐령이 있은 후에 관가(官家)에 빼앗기고 말았다.
선생을 직접 모시던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향노(鄕老) 吳道徵, 皇甫 憲, 李東哲, 金璉, 吳時佐 등이 이 같이 전하고 있다.
院中에는 다만 先生文集 85권과 퇴우당문집(退憂堂文集) 5권이 있을 뿐이다.
선생께서 이곳에 유배를 다녀가신 후로 남기신 유물과 발자취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선비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일(迎日)에 유배되었던 지평(持平) 이유(李瑜)가 오시좌(吳時佐)와 귀양살이하는 민종대(閔宗大)에게 부탁하여 고노(古老)들에게 전하는 말을 수렴해서 이같이 기록한다.
英祖元年(1725)2월
安步當車 편안한 마음으로 걷는 것이 수레를 타는 것 보다 낫고 晩食當肉 천천히 음식을 먹는 것이 고기를 먹는 것 보다 나으며 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요
求利反害 이득을 구하는 것은 도리어 해가된다.
抄錄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적음.
朱文箚疑;성리학의 문장 중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는것
[ 자료제공 및 국역 ; 木泉 李羲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