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종은 725(성덕왕 24)에 주성(鑄成)된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이다. 이 외에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과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淸州雲泉洞出土銅鐘) 등 통일신라시대에 주성된 종은 완형 3점과 파종(破鐘) 2점이 국내에 남아 있고 일본에는 4점이 남아 있어 총 9가 된다.

포항에서도 기록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주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범종의 흔적을 찾아 볼수 있다. 최초의 포항 향토지(鄕土紙) ‘일월향지의 일화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新羅古刹 內延山 寶鏡寺에는 初創期부터 이 深山 幽谷朝夕으로 時間을 알리며 指標者 役割을 하는 優雅藝術的新羅 鑄造大鐘이 하나 있어 寶鏡寺僧侶들 뿐만 아니라 이 地方 士人들은 傳統깊고 由緖있는 大鐘을 자랑 하였다. 高 約 四尺 周約 三尺半 程度現慶州市 鳳德鐘이었다고 한다. 때는 鎖國暴君 大院君攝政時代였다. 高宗三年(一八六六) 佛國艦隊江華島來襲하고 江華島 砲隊의 우리 守備兵一戰交火하여 佛國艦隊擊退하였으나 佛國艦隊新式武器大砲威力鐵船神奇함에 大驚하여 鐵船大砲至急 製造 할 것을 軍器廳嚴命하였다. 全國布告令을 내려 鐵物强制募集할 것을 方伯守領 嚴命하여 官員總動員되고 農器具除外一切鐵類陸海運路漢陽 서울에 集中 시켰다. 淸河縣 地帶에도 縣監先頭衙典吏屬 軍奴司令할 것 없이 總動員으로 古鐵探索血眼이 되어 募集하였으나 責任量할 수 없었다. 淸河使徒 아무리 生覺하여 보아도 縣內萬斥이란 多量古鐵募集理 萬無하여 이만 저만한 痛頭거리가 아니었다. 生覺다 못한 淸河使徒古鐵 責任量早速達成하는 方略講究하기 하여 六房 官屬召集하고 鳩首會議熱議하던 中 李某 衙典使徒 古鐵 募集에 좋은 方法이 있다고 아뢰오使徒는 눈이 번쩍하고 滿面微笑를 지으며 무슨 方法이 있는가?’

李 衙典 寶鏡寺 大鐘을 가져오면 우리 淸河縣 責任量 萬斥中不足量 五千斥超過할 것이요

使徒 新羅때부터 내려오는 由緖깊은 大鐘을 보경사에서 내어 놓을理 萬無한데 어떤 妙策 方法이 있는가?’

衙典 그냥 大鐘을 내놓아라 한들 보경사에서 내놓을없으나 남몰래 사람을 보내서 大鐘破壞하고 그 鐵片募集하면 할 줄 아뢰오

使徒 좋은 方法일세 너 適當處理하라

無識無謀使徒衙典新羅由緖 깊은 高貴藝術寶簡單破壞하여 古鐵募集할 것을 決議하고 말았다. 翌日 早朝使令을 보내어 大鐘架閣에서 내려다 을 질러 火熱에 떡매로 쳐서 大鐘破壞하였다. 大鐘破壞하는 騷音大驚僧侶들이 뛰어 나오니 使令逃走하여 寶鏡寺 境外 門밖에 달아 나고 있었는데 忽然 一陣狂風이 일어나 一光射線逃走하는 使令을 비치더니 晴天하늘에 雷聲振動하여 逃走하던 使令이 넘어져 卽死하였다 한다. 이를 使嗾衙典은 그 后 癩病으로 죽고 破壞淸河縣 官衙에 갖다 두었더니 募集令 中斷으로 行方不明이 되고 그래서 由緖 깊은 新羅大國寶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前 寶鏡寺 帶妻僧 住持 某)

 

 즉 보경사에는 창건 초기부터 존재 했던 것으로 보이는 높이 약 1200 mm에 둘레가 약 1050 mm 정도 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범종이 있었고, 성덕대왕 신종과 같이 예술적으로 뛰어나서 이 지방의 자랑거리 였다는 것이다. 범종의 규모만으로 본다면 8세기에 주성된 상원사나 봉덕사 종보다는 작고 9세기에 주성된 선림원 파종이나 조구신사 범종의 규모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크고 그 이후에 주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실상사 파종이나 청주 운천동 출토 종보다 규모가 크다. 고려시대 범종이 신라시대 범종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규모가 작아 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 경향을 신라시대 까지 연결해 본다면 보경사에 있었던 범종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초에 주성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범종은 보경사에서 천년의 세월을 지내 오다가 1866(고종3)에 발생한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내려진 전국의 고철 모집령에 의해 실적에 급급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청하현감과 아전의 모의로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것으로 당시 보경사 전 주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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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菴宋時烈 先生 讁居記

 

崇禎紀元之三十年乙卯閏五月(1675, 5, 肅宗 1)

 

尤菴先生이 덕원(德源)유배지로부터 장기현(長鬐縣)으로 이배(移配)되어올 때 당시(当時) 先生의 동생 시도(時燾) ,시걸(時杰)과 부실(副室)등이 같이 왔으나 성명(姓名)은 알 수 없다. 장기에 유배 올 때 선생의 나이 69.

선생일행이 장기현 경계지점에 도착하자 현내(縣內)의 마을 이름을 물으시고는 마산촌(馬山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선생께서 고을 이름에 기자(鬐字)가 들어있고 마을 이름에 마자(馬字)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하고 사관(舍舘)을 마산촌(馬山村)에 정하니 주인은 사인(士人) 吳道全이란 사람이다.

 

마산촌(馬山村)은 바다와 가까워서 바람이 심해 선생이 거처하는 방밖 처마 밑에 별도 이중벽()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다니셨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놓고 해풍(海風)을 막았다.

 

*뜰 앞에 조그만 포전(圃田)을 만들어 놓고 한가로이 거닐며 장삽(杖鍤) 으로 시초(蒔草)와 생강을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생강과 잣을 드셨다.

 

*앉으실 때는 자세를 똑바로 가지셨고 포전에 나가서도 식사는 거르지 않았다.

 

*행단(杏壇)을 쌓아놓고 그 아래 우물을 파서 금붕어를 기르며 집 뒤쪽으로 물을 끌어 들여 산초(山椒)열매와 잎줄기가 물에 젖게 하였다.

 

*창밖에는 벌을 기르며 아침저녁 들여다보곤 하셨다.

 

*선생의 동생 전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낸 시도(時燾)와 전 순창현감(淳昌 縣監)을 지낸 시걸(時杰), 아들 찰방(察訪) 기태(基泰), 손자 한림(翰林) 주석(疇錫), 증손자 증일(曾一), 증확 (曾確) 사부(師傅) 일원(一源), 교관(敎官) 유원(有源)이 항시 자주 오갔다.

 

*강승석(姜承碩)은 강효원(姜孝元)의 손자이다. 강효원은 시강원(侍講院)의 벼슬을 지내다가 정축(丁丑)년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으므로 그의 손자 강승석을 선생께서 항상 어여삐 여겨 유배지까지 데리고 와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다.

 

*선생은 평소 허리끈을 묶지 않았으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다. 간혹 베로 만든 폭건(幅巾)을 쓰기도 하며 방갓(方冠)을 썼다. 곁에는 항시 책을 수 백 권 쌓아두고 독서를 하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시며 수필(水筆)로 청마루 판자에 써서 그릇에 모아 두었다.

 

*장기에 유배 온 후로 5 년 동안 주문차의(朱文箚疑)에 착공(着工)하시어 매일 손자 주석(疇錫)과 토론하셨다. 疇錫이 자리에 있을 때는 선생께서 초록(抄錄)을 집필하셨고 疇錫이 없을 때는 글씨를 썼다.

 

*모포(牟浦)에는 옛날부터 시장(市場)이 있었는데 여자 종들이 술을 팔아서 선생의 부족한 반찬을 마련해 주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계집종들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집안에서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변소를 따로 쓰게 하였으며 언제나 아랫사람(婢僕)들에게 마을과 이웃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셨다.

 

*영일무인(武人)김씨(金氏)를 길에서 만났을 때 선생의 종놈이 그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상대방 종놈의 머리칼을 잡고 때리자 선생이 종놈의 막대기를 빼앗아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영일에 사는 씨 무인(武人)이 선생을 알아보고는 즉시 사죄를 하더라.

 

*선생께서 종 놈 들에게 나쁜 짓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허물을 물으시고 다시 그 종놈을 다스렸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로 각도(各道) 관찰사(觀察使)들이 간혹 사람을 보내서 문후(問候) 할 때나 각처에서 선비들이 와서 배알(拜謁)할 때는 선생이 몸소 위리수문(圍籬水門)안에 까지 나가서 손님을 맞았으며 얘기를 나 눌 때도 수문(水門)밖에서 하였고 문()안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선생께서 장기유배지에 도착할 당시 장기현감. 손만웅(孫萬雄)(義城武弁)이 전혀 선생을 보살피지 않았다가 원근(遠近)에 있는 현령(縣令)들이 장기현감을 해임시켜야한다고 야단을 치고 치정(治政)이 옳지 못하다고 떠들어대자 암행어사가 내려와서 장기현감을 파직하기 위해 선생을 배알 하러 왔을 때 선생께서 장기 땅은 벽지이므로 현감을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사정해서 파면은 면하게 되었다. 그런 후로 장기현감이 선생의 고마움을 깨달아 정성껏 선생을 돌보게 되었다. 선생의 도량이 이같이 넓으셨다.

 

*여주(驪州)에 사는 이수장(李壽長)이 선생을 찾아와서 글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 사람과는 선생이 평소 모르는 사이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시경(詩經)과 제자서책(諸子書冊)4월 달 부터 9월까지 가르쳤다. 그의 아비가 자기 아들이 선생의 유배지에서 글 배우는 것을 알고는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아들이 멀리 갔다는 사실을 알렸다.

내용을 알고 보니 李壽長이 가정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지도 않고 글 배우러 온 것이다.

선생이 편지를 읽은 그 이튿날 새벽에 소학(小學) 4권을 이 수장이가 공부하는 곳에 보내니 壽長이가 곧바로 선생께 하직 인사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달뜨는 저녁이면 정원을 거닐었다. 위리(圍籬)가 오래되어 헤진 곳이 있었다. 선생께서 圍籬 헤진 곳에 다 달으면 행여 한 발짝이라도 넘어갈까 걱정하여 발길을 돌려 집주인에게 물어본다. 산책길에 혹시 圍籬를 넘어간 일이 있었느냐고 하니 주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러면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시니 유배지에서의 몸가짐을 이같이 조심하였다.

 

*3월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꿩을 선생에게 갔다드리니 선생이 꿩을 만져 보시고는 지금쯤 알을 낳을 때가 되었으니 알을 품은 새를 차마 잡아먹지 못하겠다하고 다시 돌려보내니 그도 역시 산에 놓아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꿩이 새끼를 데리고 다녔다 한다.

 

*남쪽 지방은 학질(말라리아) ()이 많았다. 이웃에서 이 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선생이 거처하시는 울타리 안에 만 들어오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떠나신 뒤에도 학질병에 걸리면 송대감(宋大監)이란 글자 3만 써서 환자 등에 붙이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인 서유원(士人 徐惟遠)은 선생께서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 실 때까지 선생문하에 자주 드나들어 정이 두터웠다. 선생께서 安步當車, 晩食當肉, 爲善最樂, 求利反害라 열여섯 글자를 서유원(徐惟遠)에게 글씨를 써주니 그 집에서는 병풍을 만들어 가보(家寶)로 삼으니 읍민(邑民)들이 와서 구경하더라.

 

*장기 고을은 바닷가 벽지인지라 풍속이 예절에 맞지 않았다.

선생이 이곳에 유배 온 후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섣달 그믐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잘못된 풍습이라고 하시고 정월 초하루 날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장기 고을 사람들에게 크게 교훈을 베풀었다.

 

*선생의 집주인 오도전(吳道全)은 처음 선생이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실 때까지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많은 진도가 있어서 그 후 장기고을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해서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풍습을 고쳐 양반고을을 만들게 되었으니 선생의 가르치심이 장기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도움을 주었다.

 

*吳道全의 본명(本名)道傳이었으나 선생께서 옛날 고인(古人)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道全으로 개명했다.

 

*선생이 장기 유배시 마을에서 기르는 닭이 암놈이 갑자기 수탉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곧 유()와 같은지라 는 방향으로 말하면 서쪽에 해당되니 서방이 시끄러울 징조이려나? ”하고 걱정하셨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얼마 되지 않아서 경신(庚申)년 변화가 있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장기고을 사람들이 놀라 탄복하더라.

 

선생이 장기에서 거제(巨濟)로 이배 시(移配時) 고양이가 세발달린 새끼를 낳았고 선생이 처음 이 고을에 도착하셨을 때는 괴목(槐木)이 가시가 돋아나고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는데 위로 나뭇가지 여덟 개가 쭉 뻗어 있었으나 선생이 거제로 이배(移配) 가실 때는 괴목(槐木)을 베어 그 나뭇가지를 쪼개어 죽교(竹轎)에 싣고 가시니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선생이 을묘년(乙卯年)에 장기현에 유배(流配)왔다가 기미년(己未年)에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기까지 5년 세월이 흘렀다.

 

*巨濟 移配時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내려 왔을 때에 선생께서는 모자를 쓰시고 직령(直領)을 입고 울타리 밖에서 절을 하시고 교지를 받은 후 떠나셨다.

 

英祖 元年(1725.2) 記述

 

-

 

 

 

 

*宋時烈 : 1607(宣祖 40) - 1689(肅宗15)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 吳道全6동생 오도종(吳道宗)이 선비들과 의논을 해서 선생의 영당(影堂)을 건립코자 대구에 있는 차용징(且龍徵), 정도원장(定道院長)이 장기현에 사는 황보헌(皇甫 憲), 이동철(李 東澈)과 함께 사당(祠堂)건립 도감(都監)을 맡아 대구에 사는 봉사(奉事) 전극화(全克和)와 상의하였다.

(전극화(全克和)는 선생 문하에 출입하던 사람이다.)

 

정해(丁亥)(1707 肅宗, 33)에 영당(影堂)을 짓기 시작하여 무자(戊子)(1708)에 완공하여 그 이듬해인 기축(己丑)(1709) 46일에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유감역(兪監役)으로부터 집을 관리토록 명()하였다. 丙申(1716) 10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木主)를 원()에 봉안하고 이름을 죽림원(竹林院)이라 하였다.

오시좌(吳時佐)丁酉(1717) 辛丑(1721) 2년간에 걸쳐 사액(賜額)을 받기위해 한양에 올라가 일을 보았으며 당시 院長은 수암(遂菴)선생이었고 기타 간여한 사람과 유사(有司)까지 합하여 무려 2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원 설치(院設置)를 허락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되고 있다. 중년에 경주진사 한시유(韓是愈), 한 장(韓章)이 선생을 추모하기위해 사당(祠堂)을 건립하려 했으나 나라에서 허용치 않아 서원(書院)을 설립치 못하고 影堂을 봉암(鳳岩)에 창건하여 竹林院에 있던 影幀을 옮겨서 봉안 하였다.

임인(壬寅)년 봄에 경주 부윤(府尹) 권세백(權世栢)이 선생 影堂을 없애 버리자 그곳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당에 들어가 선생 影幀을 구해내어 다행히 훼손은 면하게 되었다. 하늘이 말리는 일이거늘 어쩔 수 있으랴.

본원(本院)의 재산으로는 논 20斗落이 있었으나 노비가 없어서 향교에 있는 노비(奴婢) 몇 사람으로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선박(船舶) 1이 있었으나 나라에서 서원(書院) 철폐령이 있은 후에 관가(官家)에 빼앗기고 말았다.

선생을 직접 모시던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향노(鄕老) 吳道徵, 皇甫 憲, 李東哲, 金璉, 吳時佐 등이 이 같이 전하고 있다.

院中에는 다만 先生文集 85권과 퇴우당문집(退憂堂文集) 5권이 있을 뿐이다.

선생께서 이곳에 유배를 다녀가신 후로 남기신 유물과 발자취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선비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일(迎日)에 유배되었던 지평(持平) 이유(李瑜)가 오시좌(吳時佐)와 귀양살이하는 민종대(閔宗大)에게 부탁하여 고노(古老)들에게 전하는 말을 수렴해서 이같이 기록한다.

 

英祖元年(1725)2

 

安步當車 편안한 마음으로 걷는 것이 수레를 타는 것 보다 낫고 晩食當肉 천천히 음식을 먹는 것이 고기를 먹는 것 보다 나으며 爲善最樂 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요

求利反害 이득을 구하는 것은 도리어 해가된다.

 

 

抄錄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적음.

朱文箚疑;성리학의 문장 중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는것

 

[ 자료제공 및 국역 ; 木泉 李羲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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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勝古蹟編

 

地方城堞地

아득한 옛날 사람이 모여 살고 사람이 衣服을 입고 禮節을 알고 集團勸力体國家必要로 하여 秩序를 바로 잡고저 할 때 그 組織体內主動体로서 指導할 사람이 必要하였으므로 사람이 모여 있고 仁慈하고 賢明한 사람을 君長으로 모시니 聖祖檀君이 그을 받은지라. 十月吉日하여 開天하고 安民保國大業을 이룩한지 五天年이 지났다. 悠久蒼蒼歷史 鴻荒茫茫記錄 離合集散興亡 嗚呼라 괴로웠던 强大民族에게 被侵記錄을 더듬어 보면 箕子東來德化設 漢武力侵略四郡分轄對韓政策 隋大規模對韓出兵征討失敗 唐都督府 設置倂合政策 蒙古五次에 걸치 韓民族侵略征討 元征東省設置武力的侵食 同化政策 明文化的 同化政策 日本壬辰武力侵略領土奪取政策 淸二回에 걸치 武力侵略南漢山城屈辱 日本近代 60年間韓民族抹殺政策 乙酉 解放 南美北蘇軍政 庚寅共産軍來襲으로 同族相殘 슬프다 그 어느 것인지 外勢侵略 外勢分裂 統一 外勢影響을 받지 않음이 있었는가? 大陸勢力해지면 海洋勢力侵犯하고 海洋勢力强大하여지면 大陸勢力侵討하는 歷史轍環에 빠짐없이 그 中間 要衝地韓半島 우리祖國陸海 兩勢力橋樑的 役割好 不好間 自担하고 있었던 것이다. 中原大陸湖陸勢力東征 日本失敗日本海洋首魁 風臣秀吉 壬辰倭亂韓明兩國侵略 淸日露日韓半島에서 決戰 日帝韓國侵食 滿洲征伐 北支 侵犯 그 어느것이나 大陸勢力海洋勢力衝突鬪爭 興亡盛衰記錄이 아님이 있었으라. 그러나 그 어느 勢力이던 에 이 民族의 줄기찬 民族魂意識的으로 精神的으로 屈伏시킬수 없었고 永遠支配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外部勢力侵略記錄뿐만 아니라 新羅 百濟 高句麗 三國樹立鬪爭 內部覇權撑握하기 派爭外勢侵略으로 干戈傷處는 이 民族으로 하여금 自己保衛 自己防禦方略으로 不知中 城을 쌓는 習性을 가르쳐 놓아 三千里 疆土에 가는 곳 마다 城疊 城堞 城砦 城池가 앞길을 가로 막는다. 그러나 민족의 安寧國家保存子孫繁榮하여 피와 땀을 흘리면서 마다하지 아니하고 쌓아놓은 그 많은 城堞들도 이제는 한갓 遺蹟 史蹟 古蹟으로 無用殘骸하였다. 成服입고 큰칼 집고 爲國忠烈先人들이 三軍號令하던 자취조차 찾아 볼수 없고, 三文巨堞도 이제는 허무러져 莎草蔓莚牛羊之道하여 護國忠魂들이 岐路彷徨하는 孤魂으로 陰風蕭蕭呼哭의 구렁텅이로 하였다. 地方에도 城堞許多하게 놓여 到處에 그 殘骸를 엿볼수 있어 子孫으로서 祖上遺業識者層에서도 더듬어 볼 生覺조차 하지 아니하고 너무 無關心하게 바라볼 뿐 어찌 祖上에게 罪悚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故莊城砦를 더듬어 보면 淸河邑城 淸河古縣城 興海邑城 長鬐邑城 延日邑城 北彌秩夫城 南彌秩夫城 神光土城 杞溪城山城 北兄山城 萬里山城 大松古邑城 烏川古縣城 磊山城 福吉山城 等等 數많은 古城殘骸가 가는 곳 마다 處處에 놓여있다. 全部城堞中最古城池新羅炤智王朝 築城興海彌秩夫城高麗末葉築城이고 李朝時代에는 大部分 補修는 하였으나 新築城池는 없다.

 

松城落后向何處 高麗에 어데로 都邑을 세우느냐

三冬日出有平壤 東南方에 새로 서울을 이루리

后代賢士開大井 后世 德있는 사람이 나라를 세우면

漢江魚龍四海通 한강의 고기들이 世界하리라 (作者未詳)

 

萬頃蒼波欲暮天 만경창파 강물우에 오늘해도 저무는데

穿魚換酒柳橋邊 낚은고기 술과 바꿔 다릿가에 취했을 때

客來向我興亡事 天下의 흥망사를 나에게 왜 묻느냐

笑指蘆花月一船 저 갈대꽃과 쪼각배의 흰달빛에 물어라. (李白 詩)

 

嘆 倭 寇 詩

白刀灑赤血 허연 칼날에 붉은 피가 흐르니

流城爲之丹 성터는 온통 피바다 로구나

名㡥古誰是 ~~ 옛날 명장을 그리워 하며

疲兵良可嘆 피로한 兵丁들이 탄식하노라

 

嘆倭寇詩討倭寇從軍한 어느 將校시라 얼마나 倭寇尤甚하였는지 이 地方 築城 全部倭寇(日本海賊)侵略防禦하기 하여 쌓었다하여도 過言이 아이니 아~ 얼마나 倭寇가 우리 祖上을 괴롭히었는 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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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과 원효의 도력내기로 유명한 오어사의 사호(寺號)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 혜공조에서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원문참조 캡쳐

 

三國遺事 卷 第四 義解第五 二惠同塵

脫校勘年移止恒沙寺. 今迎日縣吾魚寺. 諺云, “恒沙人出世故名恒沙校勘洞.”

時元曉撰諸, 每就師質疑或相調. 一日二公㳂溪掇魚蝦而啖之,

放便於石上, 公指之, “汝屎吾魚.” 故因名吾魚寺.

或人以此爲曉師之語濫也.

 

삼국유사 제4권 혜공의 출신과 기이한 행적

만년에 항사사(恒沙寺)로 옮겨 머물렀다. 지금 영일현(迎日縣)의 오어사(吾魚寺)이다.

민간에 이르기를항하사(恒河沙) 같은 많은 사람이 출세 하였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한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경소(經疏)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매양 법사에게 와서 질의하거나 혹은 서로 농담을 하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개울을 따르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변을 보고 있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의 똥은 내 고기이다.” 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오어사라 이름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를 원효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혜공과 원효의 도력내기에 대한 내용도 없고, '吾魚' 라고 서로 주장한 것도 아니고, 혜공이 한 말 이었음에도

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 졌을까? 

아마도 일월향지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1967년에 편찬된 일월향지는 1980년대 향토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시기 까지 크게 주목 받던 향토사 연구의 선구적인 향토 사학지로 이 고장 출신으로 제4대 포항시장을 지낸 박일천씨가 향토사학자로서 자료 수집과 고증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집념과 헌신적 노력에 의해 이룩한 소중한 자료이다. 일월향지는   포항 지역에 대한 역사와 전설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수록하였는데

오어사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월향지 전설편 사호 오어사의 신비

寺號 吾魚寺의 神秘

本郡 烏川面 恒沙洞 雲梯山 東南麓下 古刹이 있어 寺號를 吾魚寺라 稱하니 그 寺號가 甚히 奇異하고 神秘로와 后世人들이 慾知하고져 함도 그 理가 있나니 新羅眞平王朝의 古釋大宗이요 우리나라 佛敎界 寵兒 元曉大師가 唐에 留學하여 大悟道通하고 歸國한 后 그 法僚惠空大使와 深山幽谷한 恒沙溪伐에 來臨하여 開山하고 佛敎의 眞理를 布敎함에 餘念이 없었다. 兩古釋이 衆愚에게 佛의 法理를 說敎하나 難熱하여 理法을 體得하기 至極히 困難하므로 相酬하기를 百問不如一見이라 法力의 眩術을 衆에게 示顯하면 效多할것이라 하여 群을 모아 衆人觀示下 谷間淸流에 遊峭하면서 生魚를 捕喰后에 更活生魚함을 競爭하였는데 그 喰漁의 粕糞을 水中에 放見하니 二尾의 生魚가 元樣으로 活潑하게 溪流에 逆上함이 寸分도 前과 變함이 없어 二師는 漁勢가 强躍한 生魚를 吾魚라 主張하여 衆人이 兩師의 道心法力에 大端感嗼頌讚하여 本是 恒沙寺란 寺號吾魚寺라 呼稱하게 되었다 하니 神秘한 일이로다. 吾魚寺境內에는 元曉菴 惠空菴 慈藏菴 等의 小菴이 散在함은 如斯한 古釋大師가 來錫한 來歷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參照 三國史記)

 

여기서 원효와 혜공의 도력내기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월향지의 내용에는 큰오류가 두개 보인다.

첫째- 원효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았으나 일월향지에서는 유학하고 돌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오어사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삼국사기에서 참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큰 오류로 인해 일월향지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수는 없지만 도력 내기에 대한 내용이 전적으로 일월향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삼국유사에도 원효가 한 말이 아니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부분은 역설적으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원효의 말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내용이 책이든 구전이든 어떤 형식으로 전해 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오어사에서 원효가 저술 활동을 함에 있어서 혜공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저술의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원효가 질의를 할 대상이었다는 것은 당시 혜공의 불교에 대한 성취정도를 가름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혜공의 생몰년도를 알수 없지만 汝屎吾魚(너의 똥은 내 고기이다.)라는부분은 나이도 최소한 원효보다 어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한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불교 교리에서 금기하고 있는 살생(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었다)을 하였다는 것이다.

고승의 이러한 행동에는 필시 피치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조금만 상상력을 보태보면

 

- 만년에 오어사에 머물고 있었던 혜공은 건강까지 해칠 정도로 찬술활동에 몰두 하고 있는

  제자 또래의 젊은 원효를 보았다.

-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신을 시켜 주려고 손수 물고기 새우 등을 잡아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 스승격인 혜공의 정성에 탄복한 원효는 마지 못해 음식을 먹었으나,

   허약해진 몸에 갑자기 들어간 기름진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를 하게 되었다.

- 그 광경을 지켜본 혜공은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고 이사람아 자네가 설사한 그 것이 바로 내가 잡은 물고기이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 나라의 큰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던 원효는 자신의 일화를 후세에 보살로까지 칭송 받던 원효의는  명성에 의해 도력 내기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로 와전 된 것이다.후에 나라의 큰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던 원효는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 하였고, 원효의 명성에 의해 도력 내기로 와전된 것이다.  

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분의 사람들이 뇌리에 도력내기 스토리텔링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실 보다는 대중의 인기가 더 생명력이 강한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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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쇠터얼 봉사단 봉사활동 단체 사진

 

혜공(釋惠空) 천진공(天眞公) 집의 고용살이하는 노파의 아들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이다. 공이 일찍이 종기로 거의 죽음에 임박하자 병문안 하는 사람이 길을 메웠다. 우조는 나이 7살로서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 손님이 많습니까?” 어머니가 말하기를주인이 심한 병이 나서 장차 돌아 가시려 한다. 너는 어찌 몰랐느냐?”라고 하였다. 우조가제가 도울 있습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말을 이상하게 여겨 공에게 알렸다. 공이 불러오게 하니 좌상(坐床) 아래에 이르러 마디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종기가 터졌다. 공은 우연이라 생각하고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성하자 공을 위하여 매를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들었다. 처음 공의 동생이 관직을 얻어 지방에 부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에게 매를 골라 달라 청하여 치소(治所) 돌아갔다. 어느 공이 문득 매를 기억하고 다음날 새벽에 우조를 보내어 그것을 찾아오게 하려 했다. 우조가 이미 먼저 그것을 알고 조금 있다가 매를 가져와서 새벽에 바치었다. 공이 크게 놀라며 깨달아 바야흐로 지난 날의 종기를 구한 일이 모두 헤아릴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공이 우조 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성(至聖)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는지 몰라서 광언(狂言) 비례(非禮) 모욕하였으니 잘못을 어찌 씻겠는가. 이후에 도사가 되어 나를 인도 주길 원한다.” 마침내 내려서서 절을 했다.

신이함이 이미 나타나서 마침내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이름을 혜공(惠空)으로 바꾸었다. 작은 절에 상주하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만취하여 거리에서 삼태기를 지고 노래하며 춤을 춰서 부궤화상(和尙)이라 불렸다. 살고 있는 절은 인하여 부개사(夫蓋寺) 이름하였는데, () 향언(鄕言)이다. 매양 절의 우물 안에 들어가 수개월 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법사의 이름을 우물 이름으로 불렀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의 신동이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절의 중이 이로써 기다리게 되었고, 나오면 옷은 젖어 있지 않았다.

만년에 항사사(恒沙寺) 지금 오어사(吾魚寺) 옮겨 머물렀다. 민간에 이르기를항하사(恒河沙) 같은 많은 사람이 출세 하였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때 원효(元曉) 여러 경소(經疏) 찬술하고 있었는데 매양 법사에게 와서 질의하거나 혹은 서로 농담을 하였다. 어느 사람이 개울을 따르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위에 변을 보고 있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여 말하기를너의 변은 내가 먹은 물고기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여 오어사라 이름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를 원효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구참공이 일찍이 산에 유람을 갔다가 혜공이 길에 죽어 쓰러져 있었는데 시신이 부어 오르고 문드러져 구더기가 생긴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고삐를 돌려 성에 들어가니 혜공이 저잣거리에서 만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어느 풀을 가지고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靈妙寺) 들어가 금당(金堂) 좌우 경루(經樓) 남문(南門) 회랑을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 줄은 모름지기 3 후에 풀어라.” 강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따르니 과연 3일에 선덕왕(善德王) 가마를 타고 절로 들어왔는데 지귀(志鬼) 가슴에서 불이 나서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만은 면하게 되었다.

또한 신인종(神印宗) 조사(祖師)명랑(明朗) 새로이 금강사(金剛寺) 창건하여 낙성회를 열었을 덕이 높은 스님들이 모였으나 오직 법사만 이르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태우고 정성껏 기도를 하자 조금 뒤에 공이 왔다. 이때 마침 비가 왔으나 옷은 젖지 않았고 신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명랑에게 일러 말하기를부름이 정성스러워서 여기 왔다 하였다.

영적(靈迹) 자못 많았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하늘에 입적하였고 사리(舍利) 없이 많이 나왔다. 일찍이조론(肇論)≫ 보고이는 내가 예전에 찬술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조(僧肇) 후신임을 있다.

원효는 모든 사람의 성불 가능성을 확대하는 불성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생이 미혹하여 자신의 성불 가능성을 믿지 않으므로 불보살의 도움을 빌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토에 왕생하는 정인(正因)으로서의 발보제심(發菩提心) 중요하지만 조인(助因)으로서 공덕과 염불을 들어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중요한 그의 단월은 정안(鄭晏) 박송비(朴松庇) 비롯한 <일연비의 음기>에 보이는 인물들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정안이 일연을 초청한 것은 일연 계통이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깊다. 뒤에 강화도 선월사에 초청되어 일연이요사목우화상(遙嗣牧牛和尙)이라는 표현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이다. 그리고 정안과 함께 일연 계통이 대장경조판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독자적 판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정치적으로 일연이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은 박송비를 포함한<일연비 음기>에 나타나는 단월이라고 할 수 있다. 박송비는 덕원(德原:경북 영해)의 향리 출신으로 장군으로 입신한 후 1258(고종 45)류경·김준 등과 함께 최씨 정권을 제거하는 거사에 참여하여 고위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그 후 김준이 집권하게 되자 일시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귀된 인물이다. 일연과 박송비의 행적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일연이 대선사가 된 1259(고종 46)은 박송비 등에 의해 최의() 제거된 다음해이고, 그 뒤 왕명에 의해 선월사에 거주하다가(원종 2) 경북 영일의 오어사(吾魚社) 내려오게 된 1264(원종 5)박송비가 일시 몰락하고 김준이 권력을 장악한 해이다. 그러다가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선교명덕(禪敎名德)으로 하여금 대장낙성회를 열게 하고 이를 일연이 주맹한 1268(원종 9)은 김준이 제거된 해이다. 이처럼 일연이 중앙정치무대에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박송비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볼 때 일연의 정치적 입장은 최씨 정권과 김준 등과는 그 이해 관계를 달리하며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 까닭에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적난(賊難)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오어사 동종

경북 포항 오어사 경내에서 발견된 양식적으로 매우 뛰어난 고려후기 범종이다. 특히 몸체에 제작연대(貞祐四年: 1216)가 기록되어 있어 고려후기의 귀중한 편년 자료가 된다.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용뉴()와 작은 보주(寶珠)에 둘러싸인 음통이 있으며, 천판의 바깥 테두리에는 입상화문대를 높게 돌출 시켰다. 상대와 하대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꽃을 줄기로 연결시킨 연당초무늬를 새겼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합장한 모양의 보살좌상을 앞뒤 두 곳에 부조하였다. 보살상 사이에는 원형의 자방 주위를 이중의 도식적인 연판으로 두른 장좌를 배치하였다. 이 종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쪽 당좌위로 위패 모양의 명문곽을 만들어옴마니반메홈으로 보이는 6자의 범자무늬를 양각시킨 점이다. 이같은 범자무늬는 현재까지 가장 앞선 것으로 주목된다. 명문에는 발원자 및 발원문, 종의 무게, 사원의 명칭, 제작연대, 만든 사람(大匠順光) 등이 기록되어 있다.

 

棟華寺都藍重大師淳誠與同寺

重大師睛蓮道人僧英與同發

誠願共私貯兼集聚錫鑄成

金鍾一口三百斤懸掛于吾魚

寺以此成善普願法界生亡共

導善從者貞祐四年丙子五月十九日

大匠順光

 

동화사(棟華寺)도동중대사(都藍重大師)순성(淳誠)이 같은 절의 중대사 청련도인(睛蓮道人) () ▨(▨)과 함께 같이 지성(至誠)으로 발원하여, 함께 개인 재산을 모으고, 구리 등을 끌어모아 금종(金鐘) 1개를 주조하여 만들었다. 무게는 300()으로 오어사(吾魚寺)에 매달았다. 이것으로써 선()을 이루고 법계(法界)의 산자와 죽은자 모두 함께 선()을 좋게 되기를 널리 기원하였다.

정우(貞祐) 4년 병자년(1216, 고종 3) 5 19.

대장(大匠) 순광(順光)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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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하군수가 도임하면 의례히 명승지인 내연산 계곡과 보경사를 探勝한다. 관습적으로 군수가 軺軒을 타고 引道差使를 앞세우고 隨人 10 여인으로 행차하여 보경사에 다다르면 石門서부터 그 초헌을 轎軍으로부터 인계하여 매고 10여 리 되는 上瀑布까지 올라간다. 삼복더위에는 승려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행사가 조선왕조 오백년동안 불문율의 慣法으로 어느 의미로는 조선은 유교 전성시대이며 배불정책을 단행하여 승려를 山거지로 賤視하던 시대라 철종중년에 보경사에 속성 金氏로 法名을 弘雲이라 하여 氣骨이 壯大하고 反抗心이 强熱한 僧侶가 있어 使徒의 초헌을 매는 惡習을 打破하고져 機會를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철종말에 吉震龜 라는 村落侍生이 先親의 陰德으로 돈푼이나 있어 留京數年하여 壯洞金門에부터 한자리 한곳이 청하군수였다. 길군수 到任한지 數日后 郡官衙 慣例에 따라 인도차사 선두로 풍악을 잡히고 官妓의 歌舞에 묻히어 보경사 探勝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삼복더위라 淸河城主 吉使徒衣冠을 整齊하고 초헌타고 長竹물고 威風堂堂하게 보경사 석문에 도착하니 관아의 傳喝로 僧侶 二十餘人이 使徒一行을 맞이 하였다. 弘雲승려 사전에 同僚僧과 密約한바 있어 自進하여 사또초헌을 받아매고 상폭포로 향하여 如弓溪谷을 돌고 돌아간다. 초헌위에 사또 深山幽谷이요 山淸水麗하고 奇巖絶壁인 溪谷의 風景에 陶醉하여 冥想湧詩無我之境에 이르렀을 때 뒤에 메고 올라가던 홍운이 삐그덕 하고 아차 하자 이것이 暗號로 앞에 매고 가던 승려가 강물 쪽으로 쓰러지며 초헌은 강물 속으로 승려와 함께 굴러 떨어졌다. 물은 急流라 사또 초헌과 함께 七八間 떠내려가며 사람 살리라고 아우성 軍奴司令 急速히 달력가서 물속에 사또를 건져내니 齊冠은 行方不明 가죽신은 한 짝 없고 道袍制服은 물에 빠진 쥐새끼 처럼 實로 目不忍見의 醜態에 官奴들은 차마 웃지 못하고 靑山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脫冠濡衣의 使徒 大怒하여 여봐라 초헌 매던 중놈 잡아라 고 號痛을 쳤으나 使徒 威嚴은 아랑곳 없었다. 홍운등 2인은 混亂한 틈을타고 이미 逃走하여 山頂林間에 隱身하고 이 光景을 바라보고 呵呵大笑 하였다. 그 후부터 청하사또가 보경사 탐승시는 초헌을 승려에게 맡기지 아니 하였다 한다.

 고종말엽 탐관오리(貪官汚吏)가 횡행 천하(橫行 天下)하고 임재이화(荏宰利化)하여 토색학민(討索虐民)이 또한 일상사였다. 당시 흥해군에 안종득(安鐘得)이란 군수가 도임(到任)하여 1년여에 수천만금을 토색(討索)하고 폭정(暴政)을 감행(敢行)하여 고리대금(高利貸金) 족전란발령(族錢亂發令) 송리(訟理)의 불공평등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민원(民怨)이 적적하고 탐욕(貪慾)한 안종득 군수를 군민은 밀제군수라고 별칭 있는 정도였다. 이때 흥해군 관가에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오천인 정진석이란 쾌남아(快男兒)가 있어 안군수의 토색착취(討索搾取)로 도탄(塗炭)에 빠진 군민을 구제하려고 극비리에 흥해군 전역 리동장에게 사발통문을 발송하고 시일을 정하여 마장동(마산리)에 수천(數千) 군중(群衆)을 운집(雲集)시켜 흥해군 관가를 습격(襲擊)하여 안군수 추방(追放)을 성토(聲討)하게 되었다. 정진석공은 흥해군수 안종득의 사리사욕과 탐관오리 가렴주구의 폭정을 논란(論難)하고 군중을 선동(煽動)하여 흥해군 관가를 습격(襲擊)하고 안군수를 추방하려고 관가를 포위하여 내아(內衙)에 난입(亂入)하니 사전에 이를 찰지(察知)한 안군수는 맨발로 신광을 거쳐 도주(逃走)한 후였다. 도주한 파면(罷免)된 안군수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할 무렵이라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매수도임(買收到任)한 후 정진석공을 부사특환(府使特喚)으로 체포(逮捕)하여 동래부로 인치투옥(引置投獄)하고 구필(口筆)로 형용할수 없는 악형고문(惡刑拷問)을 감행(敢行)하며 민란의 수괴(首魁)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려 하였다. 3개월간 악형(惡刑) 태형(笞刑)을 가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태형으로 유혈이 임만(淋滿)하니 차적지(此賊地) 아혈적지(我血) 막대불효(莫大不孝)라 하며 그 유혈(流血)을 수흡(手吸) 자음(自飮)하니 동래부사 안은 범인(犯人)이 부자백(不自白)한 위증조사서(僞證調査書)를 작성하여 민란의 수괴로 참형에 처할 것을 감사에게 장계(狀啓)를 올렸다. 흥해군민이 정공의 위민의거(爲民義擧)에 감()한바 있어 경상감사에게 등진(登陳)하여 감사의 령으로  석방(釋放)시켰는데 아직 이 고장에 정공의 의거가 초동목석(樵童木石)의 미담구비(美談口碑)로 전하고 있다. -일월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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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불수(非義不受)

경주인 최공은 철종12년 상도에서 탄생해 경진에 졸하니 향년 79세였다. 초시부터 역학하여 유경관방으로 향중거유의 칭이 있었고 치산정민하여 당대 만석거부요 슬하에 9남을 두어 향중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인후하여 연일향리의 추거(推擧)로 다년간 좌수로 부임하여 비록 백두처사이나 그리 소홀히 대접할수 없는 토반으로 행세하였다. 때는 을사늑약후 순종2년에 한국의 실권은 일본관헌이 행사하고 한인군수는 일개 괴뢰(傀儡)로 전락되어 있을 때 최공은 연일군수로부터 초청을 받고 군관가에 도착할때는 미시(未時)를 지날 무렵이었다. 군수 권태환은 최공을 맞이하여 주한상을 베풀어 담소를 겸해 술이 2,3배 순으로 돌 때 정중하게 오늘 영감을 이자리에 뫼심은 어제밤 일본헌병대장이 조만간 일진회가 전국적으로 규모를 확대하고 각주 군에 그 지부를 결성하는데 본 군에서 통감부 명령으로 일진회를 결성하려 하여 일본 수비대에서 조사한 결과 북면 상도에 있는 최공이 그 회장에 최적임자라고 나로 하여금 교섭하여 보라 하므로 영감을 이자리에 뫼셨소이다. 이미 세상은 일본인 천지가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인데 시세에 따르지 아니하고 살수 있겠소 어차피 한 평생이니 영감이 일진회장에 취임할 것을 승락하여 주시오 하고 연일군수가 강청(强請)하였다. 최공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주장낭패(周章狼敗)하면서 내가 무슨 덕이 있고 기량이 있기에 그런 대임을 맡을수 있소이이까? 다른 사람을 물색선임함이 여하(如何)하시오. 일본대장이 나를 교섭하여 꼭 최우수를 회장에 취임시키라 하기에 만약불응하면 일본 통감정치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조의 구언이었으며 영감의 신변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질 터이니 심사숙고하시오. 사또 솔직히 우리 한인 끼리 하는 이야기요 마는 내가 이나라의 백성으로 일진회가 하는 일이 나의 뜻과 마땅치 못하고 또 왜인이 이땅에 와서 상황제를 위협하고 을묘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고 전국 방방곡곡에 의병이 일어나 왜병과 피를 흘리고 있는데 불충하고 용기없어 항전이야 못할망정 차마 일진회가 하는일에 가담이야 할수 있소이까 사또영감이 수비대장과 논의하여 다른 사람으로 대임하여 주시면 천만생광(千萬生光)일가 하오하였다. 권군수 흠흠이 듣고 있더니 최공의 손을 잡고 영감의 말씀이 언언구구가 수당(受當) 하고 충열이 가득하니 내가 일본대장에게 신병으로 건강이 불허하여 취임못한다고 여쭈어 보아 적절한 외지인을 보임토록 하여 보겠소이다. 최공이 귀가하여 3,4일이 지난후 군수로부터 소명장이 전달되고 임의동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최공이 연일관가에 도착하니 동헌에 군수가 좌정하고 그 옆에 일본수비대장이 완전무장으로 군도(軍刀)집고 속관(屬官)과 통역(通譯)이 연좌(連坐)하고 좌우에 이속(吏屬) 계하(階下)에 군노사령(軍奴使令)이 대립(代立)하여 위엄을 갖추고 그 분위기(雰圍氣)가 자못 험악하였다. 앗불사 일이 잘못 되었구나 생각한 최공은 군수에게 민 최우수 대령하오절하고 옆에있는 일본 수비대장에게 경의목례(敬意目禮)하며 정립(庭立)하니 수비대장이 북면 상도의 최우수는 전일 내가 이 군내에 재덕(才德)이 겸비(兼備)하다고 사람마다 칭찬(稱讚)함으로 군수에게 본군 일진회장으로 추대(推戴)하여 달라고 의뢰(依賴)하였더니 취임을 거부한다 하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본시 무식하고 용렬하여 재덕이 없고 신분이 미천한 상인으로 신병(身病)이 있어 감히 그런 대임을 맡을 수 없으므로 사또의 명령이나 만부득이 거역(拒逆)하였소. 귀하가 일본의 통감정치에 불협조하고 폭도(의병)들에게 군자금을 보내는 소문이 있는등 사상이 온당(穩當)치 못한 사람으로 단정하여 처벌하여도 일진회장 취힘을 거절하겠는가? 일본 명치천황께옵서 한국을 일본 보호국으로 하고 한국 신민을 일본 신민과 같이 보호하기 위하여 이나라에 오신 당신들이 회장에 취임하지 아니한다고 폭도의 협조자로 몰아 처벌한다 함은 명치천황의 어의(御意)에 어그러 짐이니 그런말을 거두어 주시기 바라오 수비대장은 종시(終始) 묵묵히 듣고 고개를 꺼덕꺼덕 하더니 4~5일후 재회할 때 잘 생각하여 일진회장에 취임 하도록 하시오 하고 명령조로 말하였다. 귀가(歸家)한 최공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일이 무사할리 만무하고 회장에 취임하면 조국에 반역이오 취임하지 않으면 처벌한다 하니 궁리(窮理)하였으나 별 묘안(妙案)이 없어 고민하다 종전부터 친열(親熱)한 이속(吏屬) 정모를 불러 상의한 결과 수비대장을 매수(買收)하도록 결정하고 금오백냥을 정이방(鄭吏房)에게 수교(手交)하였다. 수일후 최공은 수비대장으로부터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바늘방석에 앉은 무운()한 감()을 느끼면서 수비대장에 출두하니 대장은 반겨 맞이 하면서 일실(一室)에 초대(招待)하여 향응(饗應)을 베풀고 나에게 재물을 보내면서 일진회장의 감투를 쓰겠다고 운동(運動)을 하며 감투라면 덮어놓고 쓰겠다고 희망하는데 정이방을 통하여 재물을 보내면서 일진회장 취임을 사양(辭讓)하는 그 심정은 나도 나의 조국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라 귀하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소 하고 오백냥의 어음을 도로 내어주며 진실한 애국군자라 하더라. -일월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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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자료를 찾아볼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
이번 충주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예정되어 있는 청룡사지에는 한 곳에 한 개의 국보와 두개의 보물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보각국사 부도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요 전후에 있는 석등과 석비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기 드문 곳이죠. 그 중에 국보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볼까 합니다.

지대석에서 상륜부까지 흠 잡을데 없이 아름답지 않나요? 국보답죠...
나말여초에 정형화된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계승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팔각의 탑신이 거의 원형에 가까워 편구형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부도의 조성시기가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기단부의 사자상이나 탑신의 신장상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지난번에 언급 했는지 모르겠지만 부도에서 신장상이 나타난 것은 초기인 9세기 부터 중대석에 예외 없이 나타납니다. 10세기에 조성된 부도에서는 신장상을 볼 수 없고 주악천인상이나 합장공양상등으로 대체되다가 11세기에 조성된 거돈사 원공국사 부도 이후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다가 이 곳에서 예외적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죠. 석등형 옥개석의 우동과 끝부분의 용두가 멋있게 조각되어 있고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상륜부도 볼 만합니다.

말 할 때도 그렇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옆길로 빠지는 듯 한데요. 처음 글을 작성할 때는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에 등장한 탑신이 늘씬한 석주형 부도가
송광사 2세 진각국사부도가 이어받아 16세 고봉국사 까지 그 양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초기 부도와 비슷한 양식의 부도가 나타났는지를 이야기 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


송광사 2세 진각국사


송광사 16세 고봉국사


고봉국사(1350~1428)와 보각국사(1352~1392)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임에도 부도를 비교해 보면 정말 차이가 많이 납니다.
여기에 한 분 더 추가를 해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무학대사(1321~1405)를 언급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세 분 모두
나옹선사(1320~1376)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는 분들이 많게는 48명이라고 하니 당시 모든 불교의 스승이 나옹선사였다고 보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후에 나옹선사를 스승처럼 따르고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양주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부도만을 두고 본다면 송광사에서는 송광사에서 내려오는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양주회암사지에 있는 나옹선사부도를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8각원당형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보각국사나 무학대사도 그 계통을 이어 간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양주 회암사지 나옹선사 부도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묘향산안심사 나옹선사비에 보면 " 8월 15일에 부도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는 신륵사에 조장 하였으니 열반한 곳 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주 신륵사에는 또 다른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는데 조선시대 종형부도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 부도

어디서 많이 본 듯 하지 않나요? 저는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머리에 획 지나 갑니다.

지난 공주답사에서 보았던 마곡사 석탑 상륜부 기억 나시나요? 비슷하게 생긴 라마탑형 사리구 입니다.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일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1939년 일본인이 개성의 화장사
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도굴해서 미국에 판매한 고려시대 문화재 라고 합니다.

5개의 사리구 하부에 명호가 있는데 석가, 가섭여래, 정광여래, 지공, 나옹 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제자들은 나옹선사와 그의 스승인 지공선사를 부처님과 동급으로 모신 것 입니다.

양주회암사지의 나옹선사 부도가 승(僧)격으로서의 조형물이라면 신륵사의 부도는 불(佛)격으로서의
부도가 아닐까요?
그래서 제자들은 감히 종형의 부도를 세우지 않고 전통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는 아시다시피 도첩제까지 완전폐지 되면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부도가 세워지지 않으니 더 이상
논 할수는 없는 부분이고요..
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 등에 의해 불교가 어느정도 인정받으며 다시 조성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나옹선사가 친숙한 것은 우리지역에서 가까운 영해출신이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기록상 조선시대 최초의 불상을 보유하고 있는 영덕 장육사에 가시면( 4월 영덕 생생체험시 코스에 넣도록 협의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뒷편에 나옹선사를 모신 전각이 있습니다. 좌우에 스승인 지공선사와 제자인 무학대사 영정을 같이 모셔 놓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무학대사가 나옹선사의 수제자라고
합니다. 모든 분들이 그러하다면 맞겠지요 그런데 성격상 한번 더 꼬아서(?) 봤습니다.
나옹선사와 무학대사는 7살 차이 입니다.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는 동시대 인물이라고 봐야 옳지 않을까요?
회암사지에 있는 선각왕사비문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 앞에서 보각국사에 대한 나옹선사의
신뢰와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문 끝에 나옹선사와 관계있는 인물을 기록해 놓았는데 제일 첫번째가 보각국사이고 무학대사는 세번째에 있습니다. 나옹선사가 공들여 세운 회암사 낙성법회에 무학대사를
수좌로 초청했지만 가지 않았구요. 아마도 나옹선사와 정권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 것은 보각국사는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직인을 반납하고 현직에서 물러나고요 그해 바로 입적합니다. 그리고 익히 아시는 바와같이 무학대사는 조선 건국에 많은 공을 세우죠. 대세는 무학대사 쪽으로 흘러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고.... 후학들의 선택은.... 그래서 나옹의 수제자가 바뀐것은 아닐까요?
답사 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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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  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淂誓若國不安大乱世可 」

行誓之 又別先 未年七月廿二日大誓」

 詩尙書 傳倫淂誓三年」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맹서]을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받아들임을 맹서한다.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忠道執持’: 유교 경전을 통하여 유교의 사상과 도덕을 공부하고, 그것을 몸소 실행한다는 의미이다. 

天大罪淂誓’: 「봉평비(鳳坪碑)」에도 ‘하늘에 죄를 얻을 것(獲罪於天)’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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