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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서 조성되었거나 포항과 관련있는 범종중에서 오어사와 보경사의 동종을 제외한 다른 종들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안강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하는 비화원 제21호에 실린 내용이다.

 

잊혀져 가는 포항의 범종(비화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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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경주

별고을 성주에 다녀오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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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대학 발행지에 올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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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 주 봉사활동 

전날의 소나기 같은 비 때문에 올해도 비와 함께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좋은 날씨 였다.

분옥정 앞의 잘 가꾸어진 잔듸는 아이들이 놀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한다. 분옥정을 통해 계곡을 오가며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때문에 즐거움이 더 하는 것 같다. 동네 어르신들도 모처럼 아이들 소리를 들으니 엄청 좋다고 하셨다.

분옥정

봉황이 앉았다는 오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봉좌산은 멀리서 보면 탕건을 닮아 일명 탕건바위라고도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아래 위치한 치동마을에는 유난히 교수와 교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치동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치동문중’(致洞門中)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 일암(逸庵) 김언헌(金彦憲)이 청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울창한 산림을 손수 벌채하고 터전을 잡으니 벌치동(伐致洞)이 된다. 그러나 벌 자의 어감이 거칠게 느껴져 벌 자를 떼어내고 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가 1636(인조 14) 공의 나이 27세 되던 해 늦가을이었다. 치동은 기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농사짓기에 알맞고, 뒤쪽은 봉좌산이 우뚝 솟아 계곡이 깊어 은거에 좋은 곳이다. 공이 이곳에 자리 잡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증손 돈옹 김계영(金啓榮 1660~1729)  1679(숙종 6) 약관 19세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이 서인으로 바뀌는 등 세태가 어수선하자 돈옹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그의 각오를 분옥정 상류 50m 정도의 여울의 바닥 바위에 세이탄(洗耳灘) 이라는 음각문자를 29(1689)에 새겨 놓았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변하지 않는 바위에 새긴 것이다.

 

중국의 고사: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는 중국 신화 속 군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다음 대의 군주인 순()과 함께 이른바 '요순'(堯舜)이라 하여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요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아주 옛날 요()나라 시절에 허유(許由)라는 덕이 높은 은자가 있었다. 요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태양이 떴으니 등불은 이제 필요 없게 됐소. 부디 나를 대신하여 이 나라를 다스려 주시오."

그러자 허유는 "임금께서 잘 다스리고 계시는데 제가 대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할미새가 제 아무리 양껏 배부르게 먹는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그 작은 배만 채우면 됩니다. 제겐 천하가 아무 쓸모도 없고 흥미도 없습니다. 요리가 서툴다고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 그 직분을 넘어서 부엌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越俎代庖(월조대포) 마찬가지로 폐하의 직무를 제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대신하더라도 잘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곧바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 다시는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허유가 겸손해서 그러는 줄 알았던 요임금은 다시 사람을 보내 구주(九州)의 장이라도 맡으라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허유는 한층 더 역겨워 하면서 산 아래의 영수(潁水)라는 강가에 내려가 귀를 씻었다.  

유불욕문지 세이어영수지빈(由不欲聞之 洗耳於潁水之濱)”   

이 고장에 은거 생활을 하던 친구 소부(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 물을 먹이려 다가 마침 이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허유의 이야기를 들은 소부는  크게 웃으며, “그대가 깊은 계곡에 산다면 사람다니는 길이 통하지 않을 텐데 누가 자네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자네가 일부러 떠 돌며 알려지기 바래 명예를 구해 그렇게 된 것 아니오?” 그러고 나서 더러운 귀를 씻은 강물에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다며 상류로 끌고가 물을 먹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을 만나지 않음.

 

분옥정은 돈옹의 학덕을 기리고자 관지가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집터를 선뜻 내 놓고 김종한이 여러 종인을 참여시켜 1820(순조 20)에 지은 정자다. 여느 정자와 달리 출입은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곡물을 향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T자형 평면을 갖춘,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이 정자 건축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원래 정자명은 화수정 이었다. 화수정 기문은 추사 김정희의 6(재종형)인 우의정 주하 김도희가 썼는데 그 내용중에  당숙 유당 상공께 편액 글씨를 청하며, 내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이름은 꼭 화수를 취하고, 글 쓰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집에 부탁함은 일가의 친목을 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니 어찌 공경치 아니 하리오 라는 구절이 있다. 내용이 있다. 현재 분옥정 내에 있는 현판중에 화수정은 추사의 아버지 유당 김노경의 글씨이고 또한 용계정사 역시 그의 글씨이다. 문화재 등록하면서 전국에 많이 있는 여타의 화수정과 달리 하기 위하여 추사가 지은 분옥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花樹亭 - 酉當 金魯敬

龍溪精舍 - 酉當 金魯敬

噴玉亭 - 秋史 金正喜 : 구슬을 뿜어내는 폭포가 보이는 정자

聽流軒 - 秋史 金正喜  : 흐르는 물 소리만 들리는 곳

부친과 나란히 한 정자에 현판을 걸 경우 아들은 낙관을 찍지 않는 것이 예라고 한다. 대신 이 현판의 뒷면에 추사 선생이 경주에 사는 노 씨를 시켜 이 현판을 치동 마을로 운송하게 했다는 서술이 남아 있다.

산남의진과 치동마을

치동문중 김태환(김윤진)은 산남의진 3차 거사에서 소모장을 맡았다. 3년여 활동한 산남의진은 이 지역이 산악지대로 산악의 줄기를 타고 이동하던 탓에 일본군의 진압이 쉽지 않았던 요인도 있다. 초기 산남의진 결성당시 지역대표가 74명이나 구성되어 있었고 김태환은 기계면 대표 3인중 하나였다. 산남의진의 가장 비극적인 참변이 바로 임암전투 였고 봉계마을에서 약 30리 길이다. 봉계마을 한 구슬자는 입암마을 사건으로 하루 저녁에 50몇집의 제사가 같은 날 들이었다고 했다. 이 전투에서 김태환이 정환직 대장을 살리기 위해 업고 30리 길을 도망가서 살려서  그 은혜를 가지고 의를 맺었다고 한다.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한 김윤진을 일제의 예리한 수배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될때까지 무사히 피신 시킨 인물이 있으니 김인제 라는 분으로 일제강점기 구장을 지냈다.

 

새마을 운동과 치동마을

1881 10 2일 봉계리(치동)에서 출생한 김인제(, 소강)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일본어를 쓰지 않은 김인제는 일본의 사상교육이나 홍보 등 행사 시 일장기에 대한 충성맹세나 신사참배를 철저히 거부했다. 청년시절 부산에서 목포까지, 의주에서 북간도까지 두루 섭렵하며 풍부한 경험과 깨우침을 얻은 그는 치동으로 돌아와 교풍회(矯風會)라는 조직을 만들고 간사가 된 김인제는 자신의 가족부터 근검절약의 솔선수범을 보였다. 음주와 도박 등 폐풍(弊風)운동이 퍼지면서 술을 줄이는 사람들이 늘어나 술집을 없애고 매도하는 결단을 보였다. 농사개량조합 회의를 열어 농사기술과 종묘개량, 목화재배계를 조직했다. 절망에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술과 노름과 나태, 이런 퇴폐적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담금질하는 이 마을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에서는 급기야 수신서라는 책에 봉계리의 사례와 삽화를 실어 수년 간 보통학교의 교재로 활용하였다. 이렇듯 외부의 어떤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발전한 봉계리다. 각 가정마다 밥을 지을 때에 한 수저의 쌀을 저축하는 절미(節米)운동 등, 종친이었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철저한 협동으로 이뤄냈다. 당시 김성진과 김인제가 내건 슬로건 도박, 금주, 절약, 근면, 자조, 협동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로 새마을운동의 취지와 아주 유사하다.

후손 중 누군가는 그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시대 교사였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신서의 내용중에 봉계마을의 사례를 보았을 것이고, 이것이 결국 훗날 새마을운동 발상의 참고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그런데 이토록 명확한 봉계마을의 건전한 발전적 역사를 외면하고, 새마을운동 발상지는 정작 옆 마을로 지정되었다. 거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봉계 마을의 오래된 벤치마킹이 아니었음을 현저히 드러내려는 의도는 아닌가 생각된다. 지정된 마을의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발상지다. 일제시대 마을구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낙인 찍혔던 김인제에 관한 평가는 2004년이 되어서야 바로 잡혔다. 의병 김윤진을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를 보더라도 그는 친일과 거리가 멀었기에, 때 늦었지만 마을에서는 정성을 다해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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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종은 725(성덕왕 24)에 주성(鑄成)된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이다. 이 외에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과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淸州雲泉洞出土銅鐘) 등 통일신라시대에 주성된 종은 완형 3점과 파종(破鐘) 2점이 국내에 남아 있고 일본에는 4점이 남아 있어 총 9가 된다.

포항에서도 기록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주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범종의 흔적을 찾아 볼수 있다. 최초의 포항 향토지(鄕土紙) ‘일월향지의 일화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新羅古刹 內延山 寶鏡寺에는 初創期부터 이 深山 幽谷朝夕으로 時間을 알리며 指標者 役割을 하는 優雅藝術的新羅 鑄造大鐘이 하나 있어 寶鏡寺僧侶들 뿐만 아니라 이 地方 士人들은 傳統깊고 由緖있는 大鐘을 자랑 하였다. 高 約 四尺 周約 三尺半 程度現慶州市 鳳德鐘이었다고 한다. 때는 鎖國暴君 大院君攝政時代였다. 高宗三年(一八六六) 佛國艦隊江華島來襲하고 江華島 砲隊의 우리 守備兵一戰交火하여 佛國艦隊擊退하였으나 佛國艦隊新式武器大砲威力鐵船神奇함에 大驚하여 鐵船大砲至急 製造 할 것을 軍器廳嚴命하였다. 全國布告令을 내려 鐵物强制募集할 것을 方伯守領 嚴命하여 官員總動員되고 農器具除外一切鐵類陸海運路漢陽 서울에 集中 시켰다. 淸河縣 地帶에도 縣監先頭衙典吏屬 軍奴司令할 것 없이 總動員으로 古鐵探索血眼이 되어 募集하였으나 責任量할 수 없었다. 淸河使徒 아무리 生覺하여 보아도 縣內萬斥이란 多量古鐵募集理 萬無하여 이만 저만한 痛頭거리가 아니었다. 生覺다 못한 淸河使徒古鐵 責任量早速達成하는 方略講究하기 하여 六房 官屬召集하고 鳩首會議熱議하던 中 李某 衙典使徒 古鐵 募集에 좋은 方法이 있다고 아뢰오使徒는 눈이 번쩍하고 滿面微笑를 지으며 무슨 方法이 있는가?’

李 衙典 寶鏡寺 大鐘을 가져오면 우리 淸河縣 責任量 萬斥中不足量 五千斥超過할 것이요

使徒 新羅때부터 내려오는 由緖깊은 大鐘을 보경사에서 내어 놓을理 萬無한데 어떤 妙策 方法이 있는가?’

衙典 그냥 大鐘을 내놓아라 한들 보경사에서 내놓을없으나 남몰래 사람을 보내서 大鐘破壞하고 그 鐵片募集하면 할 줄 아뢰오

使徒 좋은 方法일세 너 適當處理하라

無識無謀使徒衙典新羅由緖 깊은 高貴藝術寶簡單破壞하여 古鐵募集할 것을 決議하고 말았다. 翌日 早朝使令을 보내어 大鐘架閣에서 내려다 을 질러 火熱에 떡매로 쳐서 大鐘破壞하였다. 大鐘破壞하는 騷音大驚僧侶들이 뛰어 나오니 使令逃走하여 寶鏡寺 境外 門밖에 달아 나고 있었는데 忽然 一陣狂風이 일어나 一光射線逃走하는 使令을 비치더니 晴天하늘에 雷聲振動하여 逃走하던 使令이 넘어져 卽死하였다 한다. 이를 使嗾衙典은 그 后 癩病으로 죽고 破壞淸河縣 官衙에 갖다 두었더니 募集令 中斷으로 行方不明이 되고 그래서 由緖 깊은 新羅大國寶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前 寶鏡寺 帶妻僧 住持 某)

 

 즉 보경사에는 창건 초기부터 존재 했던 것으로 보이는 높이 약 1200 mm에 둘레가 약 1050 mm 정도 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범종이 있었고, 성덕대왕 신종과 같이 예술적으로 뛰어나서 이 지방의 자랑거리 였다는 것이다. 범종의 규모만으로 본다면 8세기에 주성된 상원사나 봉덕사 종보다는 작고 9세기에 주성된 선림원 파종이나 조구신사 범종의 규모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크고 그 이후에 주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실상사 파종이나 청주 운천동 출토 종보다 규모가 크다. 고려시대 범종이 신라시대 범종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규모가 작아 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 경향을 신라시대 까지 연결해 본다면 보경사에 있었던 범종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초에 주성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범종은 보경사에서 천년의 세월을 지내 오다가 1866(고종3)에 발생한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내려진 전국의 고철 모집령에 의해 실적에 급급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청하현감과 아전의 모의로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것으로 당시 보경사 전 주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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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菴宋時烈 先生 讁居記

 

崇禎紀元之三十年乙卯閏五月(1675, 5, 肅宗 1)

 

尤菴先生이 덕원(德源)유배지로부터 장기현(長鬐縣)으로 이배(移配)되어올 때 당시(当時) 先生의 동생 시도(時燾) ,시걸(時杰)과 부실(副室)등이 같이 왔으나 성명(姓名)은 알 수 없다. 장기에 유배 올 때 선생의 나이 69.

선생일행이 장기현 경계지점에 도착하자 현내(縣內)의 마을 이름을 물으시고는 마산촌(馬山村)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선생께서 고을 이름에 기자(鬐字)가 들어있고 마을 이름에 마자(馬字)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다하고 사관(舍舘)을 마산촌(馬山村)에 정하니 주인은 사인(士人) 吳道全이란 사람이다.

 

마산촌(馬山村)은 바다와 가까워서 바람이 심해 선생이 거처하는 방밖 처마 밑에 별도 이중벽()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다니셨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놓고 해풍(海風)을 막았다.

 

*뜰 앞에 조그만 포전(圃田)을 만들어 놓고 한가로이 거닐며 장삽(杖鍤) 으로 시초(蒔草)와 생강을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생강과 잣을 드셨다.

 

*앉으실 때는 자세를 똑바로 가지셨고 포전에 나가서도 식사는 거르지 않았다.

 

*행단(杏壇)을 쌓아놓고 그 아래 우물을 파서 금붕어를 기르며 집 뒤쪽으로 물을 끌어 들여 산초(山椒)열매와 잎줄기가 물에 젖게 하였다.

 

*창밖에는 벌을 기르며 아침저녁 들여다보곤 하셨다.

 

*선생의 동생 전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낸 시도(時燾)와 전 순창현감(淳昌 縣監)을 지낸 시걸(時杰), 아들 찰방(察訪) 기태(基泰), 손자 한림(翰林) 주석(疇錫), 증손자 증일(曾一), 증확 (曾確) 사부(師傅) 일원(一源), 교관(敎官) 유원(有源)이 항시 자주 오갔다.

 

*강승석(姜承碩)은 강효원(姜孝元)의 손자이다. 강효원은 시강원(侍講院)의 벼슬을 지내다가 정축(丁丑)년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으므로 그의 손자 강승석을 선생께서 항상 어여삐 여겨 유배지까지 데리고 와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다.

 

*선생은 평소 허리끈을 묶지 않았으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다. 간혹 베로 만든 폭건(幅巾)을 쓰기도 하며 방갓(方冠)을 썼다. 곁에는 항시 책을 수 백 권 쌓아두고 독서를 하기도 하고 시()를 읊기도 하시며 수필(水筆)로 청마루 판자에 써서 그릇에 모아 두었다.

 

*장기에 유배 온 후로 5 년 동안 주문차의(朱文箚疑)에 착공(着工)하시어 매일 손자 주석(疇錫)과 토론하셨다. 疇錫이 자리에 있을 때는 선생께서 초록(抄錄)을 집필하셨고 疇錫이 없을 때는 글씨를 썼다.

 

*모포(牟浦)에는 옛날부터 시장(市場)이 있었는데 여자 종들이 술을 팔아서 선생의 부족한 반찬을 마련해 주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계집종들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집안에서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변소를 따로 쓰게 하였으며 언제나 아랫사람(婢僕)들에게 마을과 이웃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셨다.

 

*영일무인(武人)김씨(金氏)를 길에서 만났을 때 선생의 종놈이 그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상대방 종놈의 머리칼을 잡고 때리자 선생이 종놈의 막대기를 빼앗아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영일에 사는 씨 무인(武人)이 선생을 알아보고는 즉시 사죄를 하더라.

 

*선생께서 종 놈 들에게 나쁜 짓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허물을 물으시고 다시 그 종놈을 다스렸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이후로 각도(各道) 관찰사(觀察使)들이 간혹 사람을 보내서 문후(問候) 할 때나 각처에서 선비들이 와서 배알(拜謁)할 때는 선생이 몸소 위리수문(圍籬水門)안에 까지 나가서 손님을 맞았으며 얘기를 나 눌 때도 수문(水門)밖에서 하였고 문()안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선생께서 장기유배지에 도착할 당시 장기현감. 손만웅(孫萬雄)(義城武弁)이 전혀 선생을 보살피지 않았다가 원근(遠近)에 있는 현령(縣令)들이 장기현감을 해임시켜야한다고 야단을 치고 치정(治政)이 옳지 못하다고 떠들어대자 암행어사가 내려와서 장기현감을 파직하기 위해 선생을 배알 하러 왔을 때 선생께서 장기 땅은 벽지이므로 현감을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사정해서 파면은 면하게 되었다. 그런 후로 장기현감이 선생의 고마움을 깨달아 정성껏 선생을 돌보게 되었다. 선생의 도량이 이같이 넓으셨다.

 

*여주(驪州)에 사는 이수장(李壽長)이 선생을 찾아와서 글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 사람과는 선생이 평소 모르는 사이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잘 아는 처지였으므로 시경(詩經)과 제자서책(諸子書冊)4월 달 부터 9월까지 가르쳤다. 그의 아비가 자기 아들이 선생의 유배지에서 글 배우는 것을 알고는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아들이 멀리 갔다는 사실을 알렸다.

내용을 알고 보니 李壽長이 가정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지도 않고 글 배우러 온 것이다.

선생이 편지를 읽은 그 이튿날 새벽에 소학(小學) 4권을 이 수장이가 공부하는 곳에 보내니 壽長이가 곧바로 선생께 하직 인사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달뜨는 저녁이면 정원을 거닐었다. 위리(圍籬)가 오래되어 헤진 곳이 있었다. 선생께서 圍籬 헤진 곳에 다 달으면 행여 한 발짝이라도 넘어갈까 걱정하여 발길을 돌려 집주인에게 물어본다. 산책길에 혹시 圍籬를 넘어간 일이 있었느냐고 하니 주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러면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시니 유배지에서의 몸가짐을 이같이 조심하였다.

 

*3월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꿩을 선생에게 갔다드리니 선생이 꿩을 만져 보시고는 지금쯤 알을 낳을 때가 되었으니 알을 품은 새를 차마 잡아먹지 못하겠다하고 다시 돌려보내니 그도 역시 산에 놓아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꿩이 새끼를 데리고 다녔다 한다.

 

*남쪽 지방은 학질(말라리아) ()이 많았다. 이웃에서 이 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선생이 거처하시는 울타리 안에 만 들어오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떠나신 뒤에도 학질병에 걸리면 송대감(宋大監)이란 글자 3만 써서 환자 등에 붙이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인 서유원(士人 徐惟遠)은 선생께서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 실 때까지 선생문하에 자주 드나들어 정이 두터웠다. 선생께서 安步當車, 晩食當肉, 爲善最樂, 求利反害라 열여섯 글자를 서유원(徐惟遠)에게 글씨를 써주니 그 집에서는 병풍을 만들어 가보(家寶)로 삼으니 읍민(邑民)들이 와서 구경하더라.

 

*장기 고을은 바닷가 벽지인지라 풍속이 예절에 맞지 않았다.

선생이 이곳에 유배 온 후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섣달 그믐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잘못된 풍습이라고 하시고 정월 초하루 날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장기 고을 사람들에게 크게 교훈을 베풀었다.

 

*선생의 집주인 오도전(吳道全)은 처음 선생이 유배 오실 때부터 떠나실 때까지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많은 진도가 있어서 그 후 장기고을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해서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풍습을 고쳐 양반고을을 만들게 되었으니 선생의 가르치심이 장기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도움을 주었다.

 

*吳道全의 본명(本名)道傳이었으나 선생께서 옛날 고인(古人)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道全으로 개명했다.

 

*선생이 장기 유배시 마을에서 기르는 닭이 암놈이 갑자기 수탉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곧 유()와 같은지라 는 방향으로 말하면 서쪽에 해당되니 서방이 시끄러울 징조이려나? ”하고 걱정하셨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얼마 되지 않아서 경신(庚申)년 변화가 있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장기고을 사람들이 놀라 탄복하더라.

 

선생이 장기에서 거제(巨濟)로 이배 시(移配時) 고양이가 세발달린 새끼를 낳았고 선생이 처음 이 고을에 도착하셨을 때는 괴목(槐木)이 가시가 돋아나고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는데 위로 나뭇가지 여덟 개가 쭉 뻗어 있었으나 선생이 거제로 이배(移配) 가실 때는 괴목(槐木)을 베어 그 나뭇가지를 쪼개어 죽교(竹轎)에 싣고 가시니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선생이 을묘년(乙卯年)에 장기현에 유배(流配)왔다가 기미년(己未年)에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기까지 5년 세월이 흘렀다.

 

*巨濟 移配時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내려 왔을 때에 선생께서는 모자를 쓰시고 직령(直領)을 입고 울타리 밖에서 절을 하시고 교지를 받은 후 떠나셨다.

 

英祖 元年(1725.2) 記述

 

-

 

 

 

 

*宋時烈 : 1607(宣祖 40) - 1689(肅宗15)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 吳道全6동생 오도종(吳道宗)이 선비들과 의논을 해서 선생의 영당(影堂)을 건립코자 대구에 있는 차용징(且龍徵), 정도원장(定道院長)이 장기현에 사는 황보헌(皇甫 憲), 이동철(李 東澈)과 함께 사당(祠堂)건립 도감(都監)을 맡아 대구에 사는 봉사(奉事) 전극화(全克和)와 상의하였다.

(전극화(全克和)는 선생 문하에 출입하던 사람이다.)

 

정해(丁亥)(1707 肅宗, 33)에 영당(影堂)을 짓기 시작하여 무자(戊子)(1708)에 완공하여 그 이듬해인 기축(己丑)(1709) 46일에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유감역(兪監役)으로부터 집을 관리토록 명()하였다. 丙申(1716) 10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木主)를 원()에 봉안하고 이름을 죽림원(竹林院)이라 하였다.

오시좌(吳時佐)丁酉(1717) 辛丑(1721) 2년간에 걸쳐 사액(賜額)을 받기위해 한양에 올라가 일을 보았으며 당시 院長은 수암(遂菴)선생이었고 기타 간여한 사람과 유사(有司)까지 합하여 무려 2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원 설치(院設置)를 허락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되고 있다. 중년에 경주진사 한시유(韓是愈), 한 장(韓章)이 선생을 추모하기위해 사당(祠堂)을 건립하려 했으나 나라에서 허용치 않아 서원(書院)을 설립치 못하고 影堂을 봉암(鳳岩)에 창건하여 竹林院에 있던 影幀을 옮겨서 봉안 하였다.

임인(壬寅)년 봄에 경주 부윤(府尹) 권세백(權世栢)이 선생 影堂을 없애 버리자 그곳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당에 들어가 선생 影幀을 구해내어 다행히 훼손은 면하게 되었다. 하늘이 말리는 일이거늘 어쩔 수 있으랴.

본원(本院)의 재산으로는 논 20斗落이 있었으나 노비가 없어서 향교에 있는 노비(奴婢) 몇 사람으로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선박(船舶) 1이 있었으나 나라에서 서원(書院) 철폐령이 있은 후에 관가(官家)에 빼앗기고 말았다.

선생을 직접 모시던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향노(鄕老) 吳道徵, 皇甫 憲, 李東哲, 金璉, 吳時佐 등이 이 같이 전하고 있다.

院中에는 다만 先生文集 85권과 퇴우당문집(退憂堂文集) 5권이 있을 뿐이다.

선생께서 이곳에 유배를 다녀가신 후로 남기신 유물과 발자취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선비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일(迎日)에 유배되었던 지평(持平) 이유(李瑜)가 오시좌(吳時佐)와 귀양살이하는 민종대(閔宗大)에게 부탁하여 고노(古老)들에게 전하는 말을 수렴해서 이같이 기록한다.

 

英祖元年(1725)2

 

安步當車 편안한 마음으로 걷는 것이 수레를 타는 것 보다 낫고 晩食當肉 천천히 음식을 먹는 것이 고기를 먹는 것 보다 나으며 爲善最樂 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요

求利反害 이득을 구하는 것은 도리어 해가된다.

 

 

抄錄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적음.

朱文箚疑;성리학의 문장 중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는것

 

[ 자료제공 및 국역 ; 木泉 李羲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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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고문화연구회 강호진 회장님의 요청으로 3월15일(월요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김동하 연구원등 세분이 국구암을 조사하였습니다.

 

약 1시간 동안 꼼꼼하게 이리 저리 조사하면서

우리들이 발견하지 못한 글씨를 발견 한다던가 어슴프레 글씨 같은데 하는것도

어떤 글씨인지 알아 본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전문가는 다르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조사한 내용을 가지고 연구소에서 가서 정밀 분석해 봐야 알겠지만

대략 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하시며 의견을 주셨습니다.

 

 

주위에서 발견되는 토기조각이나 와편은 국구암과 직접적인 관계 보다는

주위에 암자나 다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국구암 동굴에는 일단 인공적인 부분이 많이 있다.

감실은 불상을 안치 하기보다 촛불등 조명이나 기도를 위한 향을 피우는 용도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시대는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고 글씨를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는

알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측편 감실이 아래로 쳐져 있는 것을 보면 한 단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든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정밀발굴 조사를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아래 쌓여 있는 흙은 토사 이기 때문에 그 안에 뭐가 있을리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아래에 혹은 벽체에는 해봐야 아는 것이고 다시 말하지만

정밀발굴조사를 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함부로 손 대는 것도 곤란하다.

포항시 문화재과에 조사결과를 보낼때 누군가 임의로 토사를 걷어 내고 싶다면

전문가 입회하에 가능하도록 의견을 제시해 줄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의 작업은 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의견을 따라 더 이상의 작업은 하지 않고

입구가 다시 막히거나 안쪽에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주기적인 모니터링 활동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名勝古蹟編

 

地方城堞地

아득한 옛날 사람이 모여 살고 사람이 衣服을 입고 禮節을 알고 集團勸力体國家必要로 하여 秩序를 바로 잡고저 할 때 그 組織体內主動体로서 指導할 사람이 必要하였으므로 사람이 모여 있고 仁慈하고 賢明한 사람을 君長으로 모시니 聖祖檀君이 그을 받은지라. 十月吉日하여 開天하고 安民保國大業을 이룩한지 五天年이 지났다. 悠久蒼蒼歷史 鴻荒茫茫記錄 離合集散興亡 嗚呼라 괴로웠던 强大民族에게 被侵記錄을 더듬어 보면 箕子東來德化設 漢武力侵略四郡分轄對韓政策 隋大規模對韓出兵征討失敗 唐都督府 設置倂合政策 蒙古五次에 걸치 韓民族侵略征討 元征東省設置武力的侵食 同化政策 明文化的 同化政策 日本壬辰武力侵略領土奪取政策 淸二回에 걸치 武力侵略南漢山城屈辱 日本近代 60年間韓民族抹殺政策 乙酉 解放 南美北蘇軍政 庚寅共産軍來襲으로 同族相殘 슬프다 그 어느 것인지 外勢侵略 外勢分裂 統一 外勢影響을 받지 않음이 있었는가? 大陸勢力해지면 海洋勢力侵犯하고 海洋勢力强大하여지면 大陸勢力侵討하는 歷史轍環에 빠짐없이 그 中間 要衝地韓半島 우리祖國陸海 兩勢力橋樑的 役割好 不好間 自担하고 있었던 것이다. 中原大陸湖陸勢力東征 日本失敗日本海洋首魁 風臣秀吉 壬辰倭亂韓明兩國侵略 淸日露日韓半島에서 決戰 日帝韓國侵食 滿洲征伐 北支 侵犯 그 어느것이나 大陸勢力海洋勢力衝突鬪爭 興亡盛衰記錄이 아님이 있었으라. 그러나 그 어느 勢力이던 에 이 民族의 줄기찬 民族魂意識的으로 精神的으로 屈伏시킬수 없었고 永遠支配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外部勢力侵略記錄뿐만 아니라 新羅 百濟 高句麗 三國樹立鬪爭 內部覇權撑握하기 派爭外勢侵略으로 干戈傷處는 이 民族으로 하여금 自己保衛 自己防禦方略으로 不知中 城을 쌓는 習性을 가르쳐 놓아 三千里 疆土에 가는 곳 마다 城疊 城堞 城砦 城池가 앞길을 가로 막는다. 그러나 민족의 安寧國家保存子孫繁榮하여 피와 땀을 흘리면서 마다하지 아니하고 쌓아놓은 그 많은 城堞들도 이제는 한갓 遺蹟 史蹟 古蹟으로 無用殘骸하였다. 成服입고 큰칼 집고 爲國忠烈先人들이 三軍號令하던 자취조차 찾아 볼수 없고, 三文巨堞도 이제는 허무러져 莎草蔓莚牛羊之道하여 護國忠魂들이 岐路彷徨하는 孤魂으로 陰風蕭蕭呼哭의 구렁텅이로 하였다. 地方에도 城堞許多하게 놓여 到處에 그 殘骸를 엿볼수 있어 子孫으로서 祖上遺業識者層에서도 더듬어 볼 生覺조차 하지 아니하고 너무 無關心하게 바라볼 뿐 어찌 祖上에게 罪悚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故莊城砦를 더듬어 보면 淸河邑城 淸河古縣城 興海邑城 長鬐邑城 延日邑城 北彌秩夫城 南彌秩夫城 神光土城 杞溪城山城 北兄山城 萬里山城 大松古邑城 烏川古縣城 磊山城 福吉山城 等等 數많은 古城殘骸가 가는 곳 마다 處處에 놓여있다. 全部城堞中最古城池新羅炤智王朝 築城興海彌秩夫城高麗末葉築城이고 李朝時代에는 大部分 補修는 하였으나 新築城池는 없다.

 

松城落后向何處 高麗에 어데로 都邑을 세우느냐

三冬日出有平壤 東南方에 새로 서울을 이루리

后代賢士開大井 后世 德있는 사람이 나라를 세우면

漢江魚龍四海通 한강의 고기들이 世界하리라 (作者未詳)

 

萬頃蒼波欲暮天 만경창파 강물우에 오늘해도 저무는데

穿魚換酒柳橋邊 낚은고기 술과 바꿔 다릿가에 취했을 때

客來向我興亡事 天下의 흥망사를 나에게 왜 묻느냐

笑指蘆花月一船 저 갈대꽃과 쪼각배의 흰달빛에 물어라. (李白 詩)

 

嘆 倭 寇 詩

白刀灑赤血 허연 칼날에 붉은 피가 흐르니

流城爲之丹 성터는 온통 피바다 로구나

名㡥古誰是 ~~ 옛날 명장을 그리워 하며

疲兵良可嘆 피로한 兵丁들이 탄식하노라

 

嘆倭寇詩討倭寇從軍한 어느 將校시라 얼마나 倭寇尤甚하였는지 이 地方 築城 全部倭寇(日本海賊)侵略防禦하기 하여 쌓었다하여도 過言이 아이니 아~ 얼마나 倭寇가 우리 祖上을 괴롭히었는 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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