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면 임중리 국구암

 

1.   위치: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 산 15-2

2.   국구암의 전승기록

임중리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승되던 국구암의 전설을 최초로 기록한 것은

1967년 발간된 포항향토사학지 일월향지로 그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구암의 괴이 (國救菴의 怪異)

영일군 지행면 임중리 (迎日郡 只杏面 林中里) 구내(區內) 임중제하(林中堤下) 

계곡(溪谷)에 소재(所在)하는 석실(石室)이 고()  10(), ()  20, 

횡심(橫深) 15척 정도의  방원형(方圓形)의 석굴(石窟)로 출입구는 일인(一人)

용신(容身)이 가능한 실로 천작(天作)의 인간(人間)이 서식(棲息)할 수 있는

()을 국구암(國救菴)이라 칭()하며 일운(一云) 국승암(國僧菴)이라 한다.  

필자(筆者)가 답사(踏査)한 결과(結果) 천연작(天然作)의 석굴(石窟)

석불(石佛)을 안치(安置)한 형적(形跡)이 있어 다소(多少) 인공(人工)을 가()

하였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 선교불승(禪敎佛僧)들의 좌선수도장(坐禪修道場)

이라 보았다. 임진왜란당시(壬辰倭亂當時)에 마미(磨糜)라는 도승(道僧)

()을 피()하여 이 석굴(石窟)에 와서 거주(居住)하며 수도(修道) 할 때  

天井中央 구멍()으로부터 백미(白米)가 일립식(一粒式) 떨어져 종일(終日) 

모으면 일인(一人) ()에 족()한지라 도승(道僧)이 이 양()으로

존명(存命)하다가 하루는 일우승려(一友僧侶)가 내유(來遊)하여 수일(數日) 

유숙(留宿)하니 양()이 부족(不足)하므로 그 구멍을 더 크게 뚫으면

다량(多糧)의 백미(白米)가 나올 줄 알고 그 구멍을 크게 죽장(竹杖)으로

뚫었더니 나오던 백미(白米)는 나오지 아니 하고 의외(意外)에도 수적(水滴)

떨어지기 시작(始作)하여 종잉(終仍)에는 사람이 그 석굴(石窟)에 거주(居住)

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 당일안내한 이공병준 다사 (當日案內한 李公柄俊 多謝)

 

 이후 영일군사 를 비롯한 포항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자에는 일월향지의

내용을 보충 및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고 아래 내용은 영일군사에 실려

있는 국구암의 내용입니다.

 

쌀알이 떨어졌던 국구암(國救菴)

포항시 장기면 임중리 임중못 계곡에 국구암 (국굴암, 국승암)이라고 하는

자연 석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마미(磨糜)라는 도승이 난을 피하여

이 석굴에서 거주하며 수도를 하고 있었을 때 천장의 구멍에서 흰쌀이

한 알씩 떨어졌는데 하루 동안 모으면 한 사람의 끼니가 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한 친구가 찾아와 몇일 머물게 되었는데 양식이

걱정된 스님은 그 구멍을 크게 하면 더 많은 쌀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대나무 지팡이로 크게 파버렸다. 그러자 기대했던 더 많은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위와 같이 쌀이 나왔다는 전설을 담고 있어 드라마 '전설의 고향' 에서도

방송되었던  천연동굴 국구암은 포항 지역의 설화 및 문화에 대한 관심있는

학자와 시민들이 관련 자료를 근거로 수 차례 답사를 하였으나 약 20년전

포항 고문화연구회의 답사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동굴을 보았다는

기록을 없었던 것은 계곡의 토사로 인해 동굴 입구가 막혔고, 계곡이

대나무와 잡목으로 길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

지난 연말에 포항의 향토사학자 황인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지난해 '포스코문화재돌봄 봉사단'에서  많은 일을 하였는데 올해 국구암 복원 을 하면 어떻겠냐?"

저도 2014년도에 수차례 가 보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라고 답을 드렸더니

이번에 동네 주민과 함께 제 위치를 찾았으니 함께 가 보자고 하십니다.

 

1월 중순에 봉사단 임원진들과 함께 사전 답사를 다녀 왔습니다. 임도에서 약 250m 계곡은

대나무와 잡목으로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가

계곡으로 다시 내려오는 50m 길도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보통의 의지로는

뚫고 지나가기 어려여 사전 답사팀도 3~4명을 제외하고는 그냥 위에서

그 위치만 확인해야 했습니다. 인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아니라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시작을 해야 할 듯 하여

임중리 이장님가 장기 충효관 관장님등의 도움을 받아서 산 소유주와

포항시의 허가를 받아 진입로와 입구 토사제거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첫 작업에 포항고문화연구회 강호진  회장님 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혹시나 안쪽에 손을 대서 훼손시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임중못 에서 국구암 까지 약 250m는 사람이 갈수 없을 정도로 대나무와 잡목이 있습니다.

포크레인은 그 길에 들어서기도 전에 길을 만들며 진행을 해야 하는데 기사분 정말 일 잘하십니다.

 

작업이 시작되자 국구암에 관심있는 많은 분들이 현장에 와 주셨습니다.

마을에서도 임중리 전 현 이장님들과 장기면 전 현 면장님도 오시고

장기면 충효관 관장님 그리고 동네 주민들도 뜨문 뜨문 나타나서

국구암에 대한 어릴적 이야기들을 들려 주십니다.

 

포크레인은 점심 시간을 제외 하고 쉬지 않고 계속 진행을 합니다. 

예상보다 빠른 오후 세시경에 국굴암 앞까지 도달 했습니다.

 

국구암 동굴입구는 볼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계속 진행 하기로 하고

첫날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첫날 작업을 마무리 할 무렵 동네 어르신이 톱을 하나들고 천천히 올라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올해 87세 라고 하시는데 아주 정정하십니다.

국구암에는 6ㆍ25전쟁때 마을 사람들과 피신 했던 기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와 보셨냐고 물으니 6.25 사변 이후 처음 이라고 하시네요.

70년 만에 올라 오신 거네요. 톱은 왜 들고 오셨나 여쭤보니 포크레인이

지나가면서 혹시나 칡이라도 나올까 싶어 가지고 오셨다는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늡니다.

 

할아버지는 이튿날에도 다시 올라 오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국구암에 대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입구로 생각되는 곳에 희미하게 글자가 보이는데 정확히 무슨글자 인지 판독은 어렵습니다.

첫글자가 정(鄭)자 같이 보인다고 하였더니 이 산의 전 소유주의 성이 정(鄭)이라고 하네요

 

다음날에는 입구를 볼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토사가 동굴을 꽉 채우지 않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첫날을 마무리 합니다.

 


이틀째 본격적으로 입구 토사를 퍼내기 시작 했습니다. 여전히 동네 분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은 포항문화역사 길라잡이 보경팀장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날씨도 어제보다 한결 좋고요. 점심전에 포크레인으로 할 것은

다 한 것 같은데도 굴의 흔적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포크레인이 내려가면

정말 낭패다 싶어 작업을 중지 시키고 조금 일찍 점심식사 하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식사 후 이장님 댁에서 곡갱이와 삽을 빌려 왔습니다. 지금 부터는 삽으로 입구를

찾아 조심스럽게 직접 파내려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를 파야하는지 어디가

입구인지 알수 없는 상태로 한참을 열심히 파내고는 있는데 더디기만 합니다

나이드신 주민들도 열심히 도와 주시니 고맙기만 한데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는지 포크레인도

버킷 방향을 반대로 바꾸고 조심스럽에 아래쪽을 파주니 한결 쉬워 졌습니다. 어느 순간 부터 인지

모르겠으나 발 아래 사람 얼굴 크기만한 두꺼비가 있어 깜짝 놀랬습니다. 겨울잠 자는 중 이었던 것

같은데 다치지는 않아 조심스럽게 삽으로 떠서 옮겨 주었습니다.

삼십분 정도 작업을 하다보니 입구라고 생각 했던곳이 아니라 우측에 커다란 공간이 보입니다.
밀려 들어온 토사가 성인 키 높이 만큼 쌓여 있지만 제법 넓은 공간임을 확인 할수 있었고요 .

안에 감실의 흔적과 글씨등이 보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국구암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컴컴한 굴에서 조용히 잠을 자던 박쥐들은 처음엔 꼼작도 하지 않더니 차츰

한 두 마리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두꺼비와 박쥐에게는 정말 민폐이지요.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하고 3월 13일 포스코 봉사단 단원들과 함께 이정표와 안내 해설판 설치 하고 안에 쌓인 토사는 약 50cm 정도만 깍아서 밖으로 내보내려 합니다. 그 이후는 정식 발굴단의 몫 같습니다.

  •  

6.25 전쟁당시 피신 왔던 분들의 기억, 그 이후 어릴적 추억이 있던 분들의 기억, 그리고 1968년 당시 이곳을 답사하고

기록으로 남겼던 박일천선생의 글에서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니 굴 바닥까지 쌓인 토사를 치운다고 해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이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맡겨야 할듯 합니다.

동굴벽에는 작은 불상을 놓았을 것 같은 감실같은 흔적이 7군데 정도, 희미해서 알아 볼 수 없는 글씨가 보입니다.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글씨가 있는 곳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  

혹시나 궁금해서 국구암을 찾는 회원분들이 계시다면 가급적 안에는 들어가지 마시고 밖에서만 보아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랜턴을 가지고 가면 밖에서도 충분히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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