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둘째 주 봉사활동 

전날의 소나기 같은 비 때문에 올해도 비와 함께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좋은 날씨 였다.

분옥정 앞의 잘 가꾸어진 잔듸는 아이들이 놀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한다. 분옥정을 통해 계곡을 오가며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때문에 즐거움이 더 하는 것 같다. 동네 어르신들도 모처럼 아이들 소리를 들으니 엄청 좋다고 하셨다.

분옥정

봉황이 앉았다는 오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봉좌산은 멀리서 보면 탕건을 닮아 일명 탕건바위라고도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아래 위치한 치동마을에는 유난히 교수와 교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치동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치동문중’(致洞門中)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 일암(逸庵) 김언헌(金彦憲)이 청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울창한 산림을 손수 벌채하고 터전을 잡으니 벌치동(伐致洞)이 된다. 그러나 벌 자의 어감이 거칠게 느껴져 벌 자를 떼어내고 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가 1636(인조 14) 공의 나이 27세 되던 해 늦가을이었다. 치동은 기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농사짓기에 알맞고, 뒤쪽은 봉좌산이 우뚝 솟아 계곡이 깊어 은거에 좋은 곳이다. 공이 이곳에 자리 잡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증손 돈옹 김계영(金啓榮 1660~1729)  1679(숙종 6) 약관 19세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이 서인으로 바뀌는 등 세태가 어수선하자 돈옹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그의 각오를 분옥정 상류 50m 정도의 여울의 바닥 바위에 세이탄(洗耳灘) 이라는 음각문자를 29(1689)에 새겨 놓았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변하지 않는 바위에 새긴 것이다.

 

중국의 고사: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는 중국 신화 속 군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다음 대의 군주인 순()과 함께 이른바 '요순'(堯舜)이라 하여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요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아주 옛날 요()나라 시절에 허유(許由)라는 덕이 높은 은자가 있었다. 요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태양이 떴으니 등불은 이제 필요 없게 됐소. 부디 나를 대신하여 이 나라를 다스려 주시오."

그러자 허유는 "임금께서 잘 다스리고 계시는데 제가 대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할미새가 제 아무리 양껏 배부르게 먹는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그 작은 배만 채우면 됩니다. 제겐 천하가 아무 쓸모도 없고 흥미도 없습니다. 요리가 서툴다고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 그 직분을 넘어서 부엌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越俎代庖(월조대포) 마찬가지로 폐하의 직무를 제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대신하더라도 잘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곧바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 다시는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허유가 겸손해서 그러는 줄 알았던 요임금은 다시 사람을 보내 구주(九州)의 장이라도 맡으라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허유는 한층 더 역겨워 하면서 산 아래의 영수(潁水)라는 강가에 내려가 귀를 씻었다.  

유불욕문지 세이어영수지빈(由不欲聞之 洗耳於潁水之濱)”   

이 고장에 은거 생활을 하던 친구 소부(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 물을 먹이려 다가 마침 이 모습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허유의 이야기를 들은 소부는  크게 웃으며, “그대가 깊은 계곡에 산다면 사람다니는 길이 통하지 않을 텐데 누가 자네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자네가 일부러 떠 돌며 알려지기 바래 명예를 구해 그렇게 된 것 아니오?” 그러고 나서 더러운 귀를 씻은 강물에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다며 상류로 끌고가 물을 먹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을 만나지 않음.

 

분옥정은 돈옹의 학덕을 기리고자 관지가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집터를 선뜻 내 놓고 김종한이 여러 종인을 참여시켜 1820(순조 20)에 지은 정자다. 여느 정자와 달리 출입은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곡물을 향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T자형 평면을 갖춘,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이 정자 건축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원래 정자명은 화수정 이었다. 화수정 기문은 추사 김정희의 6(재종형)인 우의정 주하 김도희가 썼는데 그 내용중에  당숙 유당 상공께 편액 글씨를 청하며, 내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이름은 꼭 화수를 취하고, 글 쓰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집에 부탁함은 일가의 친목을 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니 어찌 공경치 아니 하리오 라는 구절이 있다. 내용이 있다. 현재 분옥정 내에 있는 현판중에 화수정은 추사의 아버지 유당 김노경의 글씨이고 또한 용계정사 역시 그의 글씨이다. 문화재 등록하면서 전국에 많이 있는 여타의 화수정과 달리 하기 위하여 추사가 지은 분옥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花樹亭 - 酉當 金魯敬

龍溪精舍 - 酉當 金魯敬

噴玉亭 - 秋史 金正喜 : 구슬을 뿜어내는 폭포가 보이는 정자

聽流軒 - 秋史 金正喜  : 흐르는 물 소리만 들리는 곳

부친과 나란히 한 정자에 현판을 걸 경우 아들은 낙관을 찍지 않는 것이 예라고 한다. 대신 이 현판의 뒷면에 추사 선생이 경주에 사는 노 씨를 시켜 이 현판을 치동 마을로 운송하게 했다는 서술이 남아 있다.

산남의진과 치동마을

치동문중 김태환(김윤진)은 산남의진 3차 거사에서 소모장을 맡았다. 3년여 활동한 산남의진은 이 지역이 산악지대로 산악의 줄기를 타고 이동하던 탓에 일본군의 진압이 쉽지 않았던 요인도 있다. 초기 산남의진 결성당시 지역대표가 74명이나 구성되어 있었고 김태환은 기계면 대표 3인중 하나였다. 산남의진의 가장 비극적인 참변이 바로 임암전투 였고 봉계마을에서 약 30리 길이다. 봉계마을 한 구슬자는 입암마을 사건으로 하루 저녁에 50몇집의 제사가 같은 날 들이었다고 했다. 이 전투에서 김태환이 정환직 대장을 살리기 위해 업고 30리 길을 도망가서 살려서  그 은혜를 가지고 의를 맺었다고 한다.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한 김윤진을 일제의 예리한 수배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될때까지 무사히 피신 시킨 인물이 있으니 김인제 라는 분으로 일제강점기 구장을 지냈다.

 

새마을 운동과 치동마을

1881 10 2일 봉계리(치동)에서 출생한 김인제(, 소강)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일본어를 쓰지 않은 김인제는 일본의 사상교육이나 홍보 등 행사 시 일장기에 대한 충성맹세나 신사참배를 철저히 거부했다. 청년시절 부산에서 목포까지, 의주에서 북간도까지 두루 섭렵하며 풍부한 경험과 깨우침을 얻은 그는 치동으로 돌아와 교풍회(矯風會)라는 조직을 만들고 간사가 된 김인제는 자신의 가족부터 근검절약의 솔선수범을 보였다. 음주와 도박 등 폐풍(弊風)운동이 퍼지면서 술을 줄이는 사람들이 늘어나 술집을 없애고 매도하는 결단을 보였다. 농사개량조합 회의를 열어 농사기술과 종묘개량, 목화재배계를 조직했다. 절망에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술과 노름과 나태, 이런 퇴폐적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담금질하는 이 마을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에서는 급기야 수신서라는 책에 봉계리의 사례와 삽화를 실어 수년 간 보통학교의 교재로 활용하였다. 이렇듯 외부의 어떤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발전한 봉계리다. 각 가정마다 밥을 지을 때에 한 수저의 쌀을 저축하는 절미(節米)운동 등, 종친이었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철저한 협동으로 이뤄냈다. 당시 김성진과 김인제가 내건 슬로건 도박, 금주, 절약, 근면, 자조, 협동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로 새마을운동의 취지와 아주 유사하다.

후손 중 누군가는 그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시대 교사였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신서의 내용중에 봉계마을의 사례를 보았을 것이고, 이것이 결국 훗날 새마을운동 발상의 참고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그런데 이토록 명확한 봉계마을의 건전한 발전적 역사를 외면하고, 새마을운동 발상지는 정작 옆 마을로 지정되었다. 거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봉계 마을의 오래된 벤치마킹이 아니었음을 현저히 드러내려는 의도는 아닌가 생각된다. 지정된 마을의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발상지다. 일제시대 마을구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낙인 찍혔던 김인제에 관한 평가는 2004년이 되어서야 바로 잡혔다. 의병 김윤진을 무사히 피신시킨 공로를 보더라도 그는 친일과 거리가 멀었기에, 때 늦었지만 마을에서는 정성을 다해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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