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문화권:
「내포(內浦)」는 충남 서북부 가야산 주변을 통칭하는 지역으로 중국으로부터 선진불교가 전래된 지역과 천주교의 성지이고, 서민문화의 전승지이며 서해안 천혜의 자연경관을 보유한 지역이다. 보령·서산·홍성·예산·태안·당진 등 955㎢에 이르는 「내포문화권」이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내포지역을 홍주목(지금의홍성군)이관활하던 충남서천에서 경기도평택까지의 20여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가야산앞뒤의 10고을은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등이다. 2012년에 충청 남도청이 대전광역시에서 홍성군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현재 도청소재지이다. 충청남도의 161개 기관이 내포신도시 지역에 들어서고 있다
홍성:
홍성 용봉산 지역은 고려, 후백제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934년(태조 17)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싸움에서 취한 지점이다. 이로 인하여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자진 내항할 정도로 후백제와의 겨룸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지역 호족인 홍규의 딸은 태조 왕건의 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洪氏) 이다.
고려 말의 명장 최영,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 일제강점기 때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인 한용운과 김좌진 등 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忠義 烈士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원래 지명은 홍주(洪州)로, 충청도의 4대 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 중 하나로 큰 고을이었으며 인근 군현을 통솔하기도 했다. 1895년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었을 때는 홍주부(府)의 부청이 설치되어 충남 서부와 경기도 남부의 군들을 관할하는 광역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이 합쳐져 홍성군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홍주와 공주의 일본어 음독(こうしゅう)이 같다는 사유가 있었다. 이후 일제가 멋대로 지은 지명이라는 것과 홍주 지명 1000년을 맞이하면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자는 여론이 일었다. 하지만 행정비용과 비효율 때문에 시 승격 이후로 미룬 상황이다. 앞으로 내포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증가하면 향후에 시 승격 가능성이 있는데 만약 시로 승격하게 되면 홍주시라는 이름으로 승격함으로써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되찾을 예정이다.
※ 홍성군에 따르면 자력으로 시 승격을 할 수 있는 법적요건은 인구 5만 이상의 읍이 있거나 인구 2만 이상 읍이 2곳이면서 군 전체 인구가 15만 명이 넘어야 한다.
성승장군 부부묘: 성승의 묘가 맞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李泰鎭(이태진) 교수의 논문 사육신묘의 전래 상황과 민절서원의 내역 에서 六臣의 墓는 적어도 선조 13년 (1580) 이전에, ‘李氏之墓’ ‘兪氏之墓’ ‘朴氏之墓’라 표기된 묘갈(墓碣) 및 두 개의 ‘成氏之墓’라는 묘갈이 세워져 있고, 모두 5기(基)의 봉분으로 구성된 묘소, 즉 成三問 朴彭年 李塏 兪應孚 成勝의 묘소가 있었다. 이 상태는 光海君 12년(1620)경 이전까지 지속되었으며, 묘갈의 상태도 많이 마모되기는 하였지만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의 각 墓의 배열은 대개 ‘박팽년의 묘가 가장 남쪽에 있고, 그 북쪽으로 유응부 이개 성삼문의 무덤’ 순으로 서로 앞뒤에 위치해 있었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무덤에서 뒤쪽으로 10여보 떨어져 있었다. 고 성승묘의 존재와 위치까지 밝히고 있다.
엄찬고택(嚴璨古宅):
1456년 병자사화(丙子士禍)로 사육신이 참화를 당하자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은 그 시신을 김시습(金時習) 등과 수습하여 노량(露梁)에 매장하고 두문 불출 하였다.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처형된 후 성삼문의 부인과 둘째 딸 효옥이 정난공신 운성부원군 박종우(朴從愚)의 종으로 배속되었다가 1463년 세조의 명으로 방면되었다고 한다. 효옥이 성삼문의 외가이자 출생지인 이곳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박임경에게는 박증, 박호, 박한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인 박증(朴增)이 저술한 암천선생실기 (巖川先生實記)의 내용에 의하면 동생인 박호(朴壕, 1466~1533)가 성삼문의 신주를 모셔다가 외손 봉사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호의 손서(孫壻-손녀사위)가 영월엄씨 엄흔 (嚴昕, 1508~1543)으로 엄찬(嚴璨)은 엄흔의 4대손이 된다. 이 고택은 엄찬이 살았다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녹운서원이 건립되는 1676년 전까지 이곳에서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안채만이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배치 구성을 알수없지만 안채만 가지고 보면 충청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폐쇄적인 구조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채 터를 다소 급한 경사의 구릉에 둠으로써 안마당의 폐쇄감이 더욱 강해지고 안대청이 높아지게 되었다. 안대청과 지붕선을 맞추기 위해 양 날개가 높아짐에 따라 마치 2층과 같은 형태가 되어 날개채에 누다락을 꾸밀 수가 있었다. 이러한 건물 구조와 배치는 충청지역보다는 영남 지방에서 흔희 볼 수 있는 예이다. 또 다른 특징은 팔작 맞배 우진각이 한 건물에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뒤에서 바라보면 성채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용봉사: 승탑, 마애불, 괘불탱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주변에서 백제의 기와편 등이 출토되어 백제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봉사 마애불과 명문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가 있어, 창건 이후 사찰이 존속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탱화가 제작되어 사세가 꾸준히 유지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용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1795년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홍성근처인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된 것이다. 당시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서 한가한 지방의 찰방으로 좌천된 것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만도 한데 다산은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 폐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이 지역에 자신을 보낸 정조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다산은 그러한 정조의 의중을 지역의 선비들에게 전하기 위해 대표적인 인물인 인물인 성호 이익선생의 후손인 목재 이삼환을 비롯한 선비들과 계속 교류를 하였다. 다산이 이삼환을 만나러 가기위해 길을 떠나는 날 늦은 오후 용봉사에 들린 내용이 있다.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다다른 용봉사에서 묵어가기를 청했지만 관원이었던 다산을 이틀은 재워 줄수 없을 만큼 쇠락한 용봉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있었으나 묘자리가 탐난 평양조씨 (平壤趙氏) 가문에서 1906년 절을 부수고 절터에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의 묘를 쓰면서 한때 수덕사에 버금가는 사세를 지녔던 고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의 사찰은 1906년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묘가 있는 자리에는 당시의 사찰 축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는 기와편과 석재 조각이 많이 발견된다.
용봉사마애불:
바위의 오른쪽에 감실을 파고 새겼으며 높이는 230CM이며 불신은 중부조이며 광대뼈가 불거진 상호는 그보다는 조금 더 두툼하게 새겼다. 가슴께로 들어 올린 왼손은 깨졌지만 길게 늘어뜨린 오른손은 잘 남아 있으며 이는 여원인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으며 아래로 늘어진 법의는 선각으로 표현했다. 마애불의 오른쪽으로 명문이 남아 있는데 신라소성왕 1년(799)에 장진대사의 시주를 받아 원오법사가 조성했다는 기록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마애불조상기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시대 조성된 마애불중 조상기가 뚜렸하게 남아 있는 것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삼국시대말기), 경남 함안의 방어산 마애불(애장왕2년, 801), 충북 진천 태화4년명 마애불 입상(흥덕왕5년, 830) 그리고 경주 남산 윤을곡 마애불상(흥덕왕 10년, 835) 정도이다.
신경리마애불:
충남지역 고려전기 불상은 홍성 신경리마애석불, 홍성 고산사 석조여래입상, 홍성 상하리 마애석불입상, 예산 삽교 석조보살입상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눈의 모습이나 넓직한 상호 등의 표현과 낮은 부조로 양각하고 하체로 갈수록 선각에 가깝게 간략하게 표현한 방식 등이 충남지역의 지방화 된 고려 석불의 모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각시바위’라 불리는 자연암석의 앞면을 파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입상을 조각하였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을 띠고 있고, 머리부분은 고부조로 입체적이지만 얼굴에 비해서 하체로 내려 갈수로 묘사한 선이 약화되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하며 균형잡힌 이목구비와 미소짓고 있는 표정은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목은 짧은 편이며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둥글고 좁은 어깨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주름은 목 밑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가 양다리에서 갈라지고 다시 무릎 부근에서 V자형으로 합쳐지고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내려서 다리에 붙이고 왼손을 들어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고 평안을 주는 모양인 시무외여원인을 표현하였다. 광배는 감실 모양으로 판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을 2줄의 돌출선으로 표현했다. 불상의 하단에 놓인 대좌는 별도의 돌로 되었으며 옆면에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바위 위에는 사각형의 별석을 얹어 놓았다. 이 마애불은 간략하면서도 도식적으로 옷 주름이 표현되었고 조각수법이 미숙하지만 고려시대 마애불에 나타나는 괴체화(塊體化)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건립된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8세기의 이상미가 빠진 9세기 신라불상의 도식화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쓴 천개가 비석의 지붕돌과 닮아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불상은 보물 제946호인 순천 금둔사지의 석불비상을 들수 있을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 조성 이후 많은 불상들이 항마촉지인을 갖추기는 했지만 8세기 중반이다 9세기에 특별히 시무외여원인을 한 불상이 유행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수 없다. 그러나 용봉사 마애불과, 신경리 마애불은 조성시기가 다름에도 수인뿐 아니라 조금 더 통통해 지기는 했지만 상호 또한 민머리에 두툼한 육계며 찢어진 눈 그리고 앙다문 입술의 친연성이 느껴진다. 용봉사 마애불은 신경리 마애불의 모델이었을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여진다.
불상 아래에서 기와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앞의 넓은 공터에서 바라보면 용봉산의 정상 암봉도 바라보이고 홍성의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고산사:
고산사는 안에서는 아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고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온갖 변고들이 비껴갔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은 고산사 절터가 청룡산의 자궁이라고 했다. 정말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움푹 들어갔다.
대광보전 보물 399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5평 규모 건물 이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오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수 없다. 1636년에 중수한 것으로 기단은 돌을 잘 다듬어 바른층 쌓기로 되어 있고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다. 기단은 막돌로 만든 것이었으나 근래에 보수하면서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 기둥은 원주로 민흘림 기둥이다. 기둥 상부에는 다포계의 전형적인 구조인 창방과 평방을 걸고 그 위에 공포를 얹었다. 내부에 고주가 없는 무고주 5량 집이다.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조선초기의 건축물이다. 대들보 양측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중보를 올렸는데 양 동자기둥 사이에 중보를 받치는 사람 모양으로 조각한 기둥을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표정을 보면 그렇게 무거운 중보를 머리에 받치고 있어도 무거운 표정이 아니라 환하게 웃고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건물의 주요 구조 부재를 초다듬으로 하고 부분적으로 장식조각이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는데 이 건물에서 그러한 조선 후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머리가 몸체보다 크게 보이지만 이상하게 당당하다.
고산사 아미타불좌상:
소조불의 아미타불좌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88호)을 모셔 놓았다. 고려후기 여래상의 특징을 잘 간직하면서도 조선전기로 이행되면서 나타나는 세부적 변화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토속적인 느낌을 주며 머리는 나발이 뚜렸하고 목에는 삼도를 얕게 새겼다. 즉 갸름한 얼굴형태나 착의법 형식에서는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어깨위로 치켜 올려진 옷주름이나 각진 주름 표현 등에서는 조선 전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반듯한 자세에 낮은 무릎, 손가락을 유난히 크게 표현한 점 등은 이 불상의 독특한 특징으로 생각되며 세부적으로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잘 표현되어 있는 점은 소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산사 석조여래 입상:
법당 옆에는 석조여래입상이 덤덤하게 서있다. 인근 산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 옮겨 왔다고 한다. 언제 누가 왜 불상을 묻었는지 알 수 없다. 손 모양과 주름으로 미뤄 볼 때 고려 때 불상이라고 했다.
타원형의 둥근 얼굴에 둥글게 솟은 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마모되어 선명하지 않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편편하고 길쭉한 신체에 통견식의 대의를 입었으며 목 밑에서부터 총총하게 둥근 옷주름이 측면까지 이어지면서 새겨져 있다. 대퇴부에서 양 다리 사이로 신체의 굴곡이 남아 있어 전체적으로 얇은 대의를 걸쳤음을 알 수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그냥 내리고 왼손은 가슴 위로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고산사 삼층석탑:
전체적인 외관이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초기처럼 깔끔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은 보이지 않지만 전대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석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탑신석과 옥개석을 일석으로 마련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산사 삼층석탑은 규모가 작음에도 탑신석과 옥개석을 별석으로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