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월지(日月池)

연오랑세오녀(延烏朗細烏女) 설화의 발상지로써 세오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려 해와 달의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전해오는 제천지(祭天池)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年: 157)에 동해 바닷가에는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이것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은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 (일본 제기를 상고해 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이고 실재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오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었다.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싣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가 없었다.

 

일자(日者: 해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왕에게 아뢰기를해와 달이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았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야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아졌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서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도기야(都祈野)라 한다.』이 설화는 우리 고장의 유구성과 특수성을 밝혀주는 역사적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처럼 신화나 설화는 기록이 없었던 시대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며, 당시의 역사적 진실이 녹아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전승되어 기록되어 남겨진 것이다.

 

일월지 못 둑 바로 밑의 농지였던 곳에 1989~1990년 4만5천평 정도의 연병장이 조성되었다. 4~5년이  지난후 한 해 날이 가물어 일월지 못물을 빼 사용했는데 바로 그 이튿날 해병부대 군인들이 수색작전을 펴다가 12~13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일월지 물을 건드려 그렇다고 하여 그 때부터 해병사단장이 절대 일월지의 물을 손대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일월(日月)과 관계된 유적

[일월사당]:연오랑ㆍ세오녀의 설화를 바탕으로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우수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러운 해, 달 설화를 지역민에게 희망적인 정서문화로 승화시키는 표본으로 삼고자 일월사당을 복원하였다. 지역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코자 매년 10월에 천지신명(, )에 제사를 지냈는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가 개최되는 해에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으며, 1994년 영일군수가 초헌관이 되었으며 1995년부터는 영일군과 포항시의 통합으로 포항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포항시의 발전과 시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일월신제를 올리고 있다.

 

 

 

[일월지]:해병부대 내에 3,000여평 면적의 일월지가 위치하고 있다. 1992년 영일군비 지원금으로 영일문화원이 주관하여 일월지를 정화하고 수중펌프를 설치하여 일월지의 물을 해병부대 관리하에 정화시키고 있다.

제단(天祭壇):일제 침략전까지 일월지 부근에 신라시대부터 일월에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있어서 매년 9월 중양절에 해와 달에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일제 침략후 제단을 철거하였다함.

[일월지 사적비]:일월지 앞 중앙에 일월지사적비가 위치하고 있다. 일제침략 후 일제가 사적비를 철거시켰던 것을 1992 3월에 당시 영일문화원이 주관하여 영일군비 보조와 해병부대의 인력지원을 받아 일월지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2. 해병대박물관

 

3.세계리 당평:당평마을에는 천제당이 있었는데 연오세오를 모시는 제당이 있었고 당()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자료를 발견되기까지 하였다.

 

 

4. 동해면 입석: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신정1

  신정1리 마을 입구에 있는 것으로 할매 짝지돌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도구리 동해초등학교 교정에 할배 짝지돌이 있다.

 

 

 

 

 

 

 

5.동해면 고인돌

 

선사인(先史人)들이 남겨 놓은 유적 중 가장 특징있는 것이 고인돌로서 선돌(立石)과 더불어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일환으로 생각되는데, 그 기원은 알 수가 없으나 고인돌의 분포상황이나 구조로 보아 시베리아에서 전해진 석상분(石箱墳)이 우리나라 서북지방에서 고인돌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외관상으로 보면 유럽 지중해 연안에 퍼져있는 돌멘dolmen과 흡사하여 한반도의 고인돌을 돌멘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기능이나 세부구조에서 차이가 나며 북유럽, 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영국 등지에서부터 한반도 주변까지의 전파 경로가 연결되지 않아 문화적인 관계가 먼 것 같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산둥반도 주변의 해안지역, 요동반도, 중국의 동북부지역에서 보이며, 일본 구주지방(九州地方)까지 분포하고 있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문화영역으로 묶을 수 있다.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종류는 지석묘, 선돌, 칠성(七星)바위, 돌무덤(석총:石塚)이 주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고인돌은 그 구조로 보아 종래에는 북방식(北方式:탁자식)과 남방식(南方式:기단식)으로 나누었으나 남방식에 지석(支石)이 없는 형식을 덧붙여 개석식(蓋石式), 또 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 포함)의 차이는 매장구조의 위치인데 매장구조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것북방식, 지하에 묻힌 것남방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네 개의 판석으로 장방형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개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주로 북쪽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남쪽의 한계선이 수원, 용인을 잇는 선으로 그 이남이 되면 분포가 적어진다. 남방식은 바둑판같은 커다란 돌 밑에 몇 개의 돌을 고이고 매장구조를 그 아래에 둔 것인데 주로 남한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나 전국에 걸쳐 발견된다. 무지석식(無支石式)은 바둑판에서 지석이 생략된 형태인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1964년 국립박물관에서 주관했다고 남아있는 "영일 지석묘 발굴에 관한 기록" 1985년 경상북도가 경북대학교 부속 박물관에 의뢰해서 조사한 "동해 문화권 지표조사"에서 기계면, 청하면, 흥해읍, 신광면 일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1985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조사 보고된 '월성군, 영일군 지표조사"에서는 기계면에 관한 기록뿐이다. 이 지역의 선사문화가 종합적으로 기록된 것은 영일군에서 편찬된 영일군사(迎日郡史)가 처음이고, 그 후부터 체계적으로 조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수 많은 고인돌과 선돌이 조사되었으며 세형동검(細形銅劒), 돌도끼, 홈자귀, 반달돌칼, 가락바퀴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오랜 옛날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많이 살아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1: 981호 지방 국도변에서 남쪽방향으로 60m 지점의 밭 위에 있다. 덮개 돌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지석이 1개 드러나 보인다. 덮개 돌의 크기는 290x190x120cm이다. 장축의 방위각은 N88E이다.

2: 1호 고인돌에서 남서방향으로 약 100m 지점에 있으며, 1호 보다는 작은 편이다. 덮개 돌의 크기는 150x140x60cm이며 원형에 가깝다. 장축의 방향은 동서 방위각 N88E이다.

3: 2호 고인돌에서 시내를 사이에 두고 남서 48도 방향으로 150m 흥환 분교에서 남쪽으로 200m 산 중턱에 있으며 덮개 돌이 들려 있는 상태로 석관이 들여다 보인다. 덮개 돌은 동, 방위각은 N42E이다.

4: 3호 고인돌에서 남서 40도 방향으로 40m에 있음. 받침돌이 2개 드러난 상태. 덮개 돌의 크기는 380x260x80cm이며 장축의 방향은 북동, 방위각은 N42E이다.

5: 4호에서 남서쪽으로 25m 거리에 있으며 받침돌과 덮개 돌이 떨어져 있음. 덮개 돌의 크기는 130x130x62cm이다.

6: 5호에서 남서방향으로 75m 지점의 밭 위에 있음. 덮개 돌의 크기는 130x110x50cm이다.

7: 5호에서 50m 거리에 있으며 덮개 돌이 3등분으로 균열되고 이완되어 있으며 그 중 가운데 것에는 성혈로 생각되는 흔적이 보임. 덮개 돌의 크기는 300x200x100cm이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중흥리

중흥리의 고인돌은 마을 건너편의 밭에 칠성(七星)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고인돌의 배치를 북두성(北斗星)의 별자리와 흡사하게 배치하였다는 연구는 한흥수(韓興洙)가 처음으로 기록한 황해도 송림 석탄리 이후 이러한 배치에 대하여 조사 연구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다. 이곳에 있는 큰 돌들에 대하여 이만택씨(중흥리 거주)에 의하면 옛부터 이 돌들이 칠성바위로 전해왔으며 3번째 돌에 치성을 드려왔다고 하였다. 중흥리 큰 돌들은 북두칠성의 별자리 모양과 똑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모양이다. A에서 B사이는 49.5m, B에서 C사이는 13m, C에서 D사이는 10.8m, D에서 E사이는 13.5m, E에서 F사이는 31.8m, F에서 G사이는 65.9m이며 G에서 A사이는 125m이다.

1(A):중흥리 새마을 회관에서 남동쪽으로 100m 지점에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320x210x160cm이다. 방위각은 N10E이다.

2(B): 1호에서 남동 10도 방향으로 밭 한 가운데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150x130x60cm이다.

3(C): 2호에서 남동쪽으로 13m 지점 밭 위에 위치하며 7각으로 인공을 가한 흔적이 보이며,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덮개 돌의 크기는 320x210x160cm이며 7각 입방체이다.

4(D): 3호에서 남서쪽으로 10m 거리의 밭 위에 거북등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240x150x80cm 이다.

5(E): 4호에서 남서방향으로 13n 지점의 밭 위에 있으며 북쪽과 서편쪽에 인공을 가하여 잘라낸 흔적이 있으며 성혈이 보인다.

6(F): 5호에서 서쪽방향으로 30m 지점 밭 위에 있음. 덮개 돌의 크기는 100x60x70cm이다.

7(G): 6호에서 남동쪽으로 70m 산비탈 밭 위에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140x130x60cm이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금광리

약전에서 서쪽으로 1km쯤 가면 신정1(염장)가 나오고, 다시 1km쯤 가면 좌측의 해올산 산비탈의 밭에 고인돌 2기가 있다. 이것은 원위치에서 옮겨진 것 같으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금광마을 입구의 두번째 집 담장부터 고인돌이 연결되어 있는데 8기가 있었으나 논 가운데 있던 1기는 중장비에 의하여 제거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 마을 입구의 민가 담장과 같이 쌓여 있는 것으로 덮개 돌의 크기는 332x228x175cm이다.

2: 1호 고인돌에서 30m 떨어진 민가 마당에 있는 것으로 지석 1개가 보이며 덮개 돌의 크기는 254x140x115cm로 모양은 장방형이다.

3: 2호에서 1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민간의 담장에 붙어 있는 것으로 지석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238x180x93cm이다.

4: 3호에서 1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306x130x170cm로 민가에 있음.

5: 4호에서 직선으로 1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민가의 마당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덮개 돌의 크기는 200x148x75cm이다.

6: 5호에서 14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덮개 돌의 크기는 200x150x110cm로 마을 안에 있으며 많이 파손되었음

7: 금강보건진료소 뒷편에 있던 것으로 덮개 돌의 크기는 220x124x100cm로 장방형이었음. 현재는 없어졌음. 7호에서 50m 떨어진 곳에 1기가 더 있었으나 중장비로 제거되어 없어졌음. 덮개 돌의 크기는 300x200x0.9cm였음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

상정3리 마을회관 앞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훼손되고 없다. 교회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1기가 있었으나 집을 축조하면서 없어졌다. 이것의 덮개 돌 크기는 120x190x70cm였고 여기에서 1km 거리에 있는 중산리 마을입구에 성혈이 많은 파손된 고인돌이 무덤 뒤에 1기가 있다. 중산리에서 공당리 가는 길목의 우측 밭에 파괴된 2기가 있는데 덮개 돌의 크기가 219x168x130cm이고 약 30m 남쪽에 있는 고인돌의 덮개 돌 크기는 163x64x100cm이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공당리

공당리에서 장기면 죽실로 넘어가는 갈림길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그 느티나무에 기대어서 고인돌이 있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서 덮개 돌의 크기는 300x300x140cm이고 주변에는 치성을 드렸던 흔적이 있으며, 그 곳에서 약 5~6m 떨어진 논 가운데 고인돌 3기가 있다. 덮개 돌의 크기는 100x55x65cm 130x50x45cm이고 또 1기는 110x55x45cm이다.

6. 폐고분군

7. 오천서원(烏川書院): 오천읍 원리 590번지

 ㅁ 연혁:오천읍 원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1588(선조 21)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습명(鄭襲明)과 정몽주(鄭夢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2(광해군 4)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1613(광해군 5) '오천(烏川)'이라고 사액 되었으며, 1740(영조 16) 정사도(鄭思道)와 정철(鄭澈)을 추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 4(?) 4()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2,500여 평이 있다.

ㅁ 제향 인물

1) 정습명(鄭襲明): ~ 1151(의종 5). 고려 중기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보임되었고, 그 뒤 기거주(起居注),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1140(인종 18) 최충(崔沖),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거부당하였다. 1146(인종 24) 예부시랑에 승진하여 태자(太子:의종)에게 강서(講書)하였고, 그 뒤 승선, 한림학사, 추밀원 지주사(樞密院 知奏事) 등을 지냈다. 의종 즉위 후 선왕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거침없이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고, 김존중(金存中) 등에게 비방을 받자 자결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어 <<석죽화>> 3편의 시와 표전(表箋) <<동문선>>에 전한다

2) 정몽주(鄭夢周):1337(충숙왕 복위 6) ~ 1392(공양왕 4). 고려 말기 문신, 학자로 자()는 달가(達可), ()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1360(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 수찬(修撰)을 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郞將兼閤門祗侯), 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 전농시승(典農寺丞)을 지냈다. 1367년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를 겸임하였으며,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司藝), 직강(直講), 사성(司成)을 지내고, 1372년 중국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按廉使),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지냈다. 1376(우왕 2) 성균관 대사성으로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백성 수 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판서, 예의사판서, 전법사판서, 판도사판서를 지냈으며,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同知春秋館 事上護軍)이 되었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뒤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삼사좌사, 문하찬성사,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389(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 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에 봉해지고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지냈다.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피살되었다. 오부학당, 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저서로는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3) 정사도(鄭思道):1318(충숙왕 5) ~ 1379(우왕 5).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365년에는 경상도 순문사에 임명되어 합포(合浦)에 있었는데, 마침 최영이 신돈의 참소를 입고 동서강도 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에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전보되어 경주에 오게 되자, 왕의 조처에 불만을 가진 신돈이 다시 일을 꾸며 보고하고 그의 당류(黨類) 이득림(李得霖)을 경주에 보내어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고 하자,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뒤 1368년에는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있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이 협소하다고 하여 마암(馬巖)으로 옮겨 짓게 하자 첨서밀직(僉書密直)으로서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柳濯),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영전의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가 왕의 비위를 건드려 감옥에 일시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5(우왕 1)에는 당시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받아 정몽주, 김구용(金九容),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4) 정철(鄭澈):1536(중종 31) ~ 1593(선조 26). 조선 중기 문신, 학자로 자()는 계함(季涵), ()는 송강(松江),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율곡 이이와 동갑내기인 정철은 돈녕부 판관을 지낸 유침의 아들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 문학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 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免仰亭歌)', 정해정의 '석촌별곡(石村別曲)'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關東八景)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짓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사림(士林)이라는 사회 세력이 등장하여 기존의 훈구, 척신세력을 밀어내고 집권세력을 형성함에 따른 사림과 훈구세력 사이의 투쟁, 사림들 간의 당쟁, 사화(士禍), 그리고 임진왜란 등 사회 상황의 한복판에서 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거침없이 밀고 나간 정치가였는가 하면,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해 낸 문인이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네 인간의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풍류인이요, 타고난 재인(才人)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오늘날 송강의 시비(詩碑)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예술관 입구에 있는데, 이는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도민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짓고 관동별곡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ㅁ 구조: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당인 충정묘, 강당, 동재, 재실, 신문(神門)이 있다. 사당인 충정묘에는 정습명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정몽주, 정사도, 정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왔다.

1)사당인 충정묘(忠正廟)는 정면 3,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겹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2)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5, 측면 2칸의 건물로 팔작지붕의 홑처마 건물이다. 정면에 세살 사분합문이 펼쳐져 있다.

3) 동재:정면 3,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중간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실()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다.

4) 오천재:재실인 오천재(烏川齋)는 강당의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4,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홑처마 구조로 되어 있다. 중앙의 대청과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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