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은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세 개의 건축물을 남겼다. 은둔 생활을 위해 지은 독락당, 본가에 건립한 별당 무첨당, 노모를 봉양하는 동생을 위해 지은 대저택 향단이 바로 그것이다. 건축 시기와 목적에 따라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개성을 선보이는 이들 세 건물과 함께, 흔희 알려진 성리학자의 모습이 아닌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들여다 본다.


성리학의 수호자

"우리의 허(虛)는 허하나 유(有)하며, 저들의 허는 무(無)합니다. 우리의 적(寂)은 적하나 감(感)하지만, 저들의 적은 적하면서 멸(滅)합니다. 그러한 즉, 저들과 우리의 허적(虛寂)은 같은것 같지만 그 결과는 결코 다릅니다."  이 짧은 언설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 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27세 청년이 당대 초유의 사상 논쟁에 끼어 들면서 주장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란 정통 성리학자들을 가리키며 '저들'이란 이른바 사이비 이단이 무리들이다. 이 언설의 주인공은 바로 이언적이다. 그는 이 한마디로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근본을 바로 세웠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았으며, 동방 오현의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동방오현이란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 가운데 가장 빼어난 다서 명을 일컫는데, 이언적을 포함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이 여기에 속한다. 그 유명한 이이나 송시열도 여기에 끼지 못하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동방 오현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김굉필과 조광조는 사화의 주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정여창과 이언적은 유배 중 병사 했으니, 온전히 천수를 누린이는 이황 뿐이었다.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며 이른바 도학(道學)을 정립했으며, 그 대가로 성리학은 주류의 학문이자 견고한 종교가 될 수 있었다. 

  이언적의 아버지는 여주 이씨 이번이고, 어머니는 월성 손씨였다.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열 살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의 가르침과 후원으로 성장했다. 물려받은 외가 재산을 바탕으로 양동마을에 여주 이씨의 종가를 건설하고 정착했으니, 양동마을은 이언적의 정신이고 실질적인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이언적이 과거에 급제할 당시는 조광조가 실권을 쥐고 급진적인 도학 정치를 펼칠 때 였다. 이언적은 그를 등용하려는 조광조의 요청을 사양하고 고향 근천인 경주 학교의 교관으로 머물렀다. 이때 마침 향리에는 문제적 인물로 조한보가 내려와 있었다. 조한보는 성균관 재학 시절에 도맹 휴학을 주도하여 퇴학 당한 인물로, 향리학자인 손숙돈과 성리학사상 가장 유명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른바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인데, 청년 이언적은 외삼촌 손숙돈을 대신하여 이 논쟁에 뛰어 들었다. 그는 글머리에 인용한 것처럼 강력한 논리로 조한보의 학설을 몰아쳤고, 정통 성리학의 총아로 전국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청년 이언적의 출세는 순조로웠다. 중앙 관직으로는 홍관과 박사와 성균관 사성, 사간원 사간등 주로 학술과 언로에 종사했으나, 틈틈이 모친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자청하여 경상도 일대의 지방 수령으로도 봉직했다. 그러다 40세때 가혹한 시련에 부딪힌다. 당대의 권력자 김안로의 기용에 맞서다가 벼슬을 뺏기고 낙향하게 된 것이다. 이에 그는 고향 마을 인근 옥산리 자계동에 독락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심신을 수련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언적은 7년 동안 지속된 은거 생활 끝에 47세에 복직한다. 그 다음으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판윤, 이조 형조 예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좌의정까지 이르게 된다. 세속적으로 보면 이 시기가 이언적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때 그는 고향인 양동마을 종가에 별당 건물을 따로 지었고, 고향을 지키는 동생을 위해 대저택 향단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정계의 실세로 등장한 윤원형일당에 의해 견제 당하다가 56세에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모진 귀양 생활에 병을 얻어 1553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천인합일의 은거 건축 독락당

그의 사상과 인격을 획기적으로 바꾼 계기는 중년에 겪은 7년간의 은거 생활이었다. 옥산리 자계동 독락당 터에는 원래 그의 부친이 세운 정자가 있었고, 젊은 시절의 추억도 존재했다. 이언적은 25세 때 당시 풍습대로 첩을 얻었다. 소실인 양주 석씨 부인은 시집오면서 이 인근에 살림채를 지었다. 경주 교관시절 그는 본부인이 있는 양동 본가보다 소실이 있는 이곳에 주로 거처했으며, 낙향해서도 옥산리에 정착해 별당인 독락당을 조성하고 본격적인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독락당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자계 골짜기 가운데에 위치했다. 이언적은 사방의 산들에 이름을 붙였다. 북쪽 주산을 도덕산으로 , 멀리 남쪽 봉우리를 무학산이라 하여 안산으로 삼았다. 동쪽과 서쪽 봉우리는 각각 화개산과 자옥산이라 이름 붙였다. 또한 계곡에 숱하게 널린 바위 가운데 다섯개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했다.  물고기를 바라보는 관어대(觀漁臺), 노래를 부르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풀고 땀을 식히는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다스리는 징심대(澄心臺), 그리고 잡념을 씻는 세심대(洗心臺)가 그것이다. 이들 사산오대(四山五臺)의 이름은 원리적인 성리학의 세계를 넘어 도교적인 세계관에 속한다.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출발하여 이 사산오대를 일주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것을 은둔 생활의 일과로 삼았다. 외부인과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즐기는 독락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독락당 뒤쪽에는 정혜사라는 신라 때 창건한 사찰이 있었다. 현재도 독특한 13층 석탑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가 은거 중에 유일하게 교류한 이는 바로 정혜사의 주지스님이었다.  독락당 뒤편 계정이라는 정자에 양진암 이라는 방을 만들고 뒷문을 통해 정혜사와 이 방을 오갔다고 전한다. 도가와 불가의 영향마저 '이단의 사설'이라고 몰아쳤던 그가 아니었던가? 인생의 굴곡은 새로운 방향을 향한 변곡점이며 좌절은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여는 열쇠였던 것이다. 

  이 집의 형식적은 정면은 대문채가 있는 남쪽 면이다. 일반적인 주택은 대문쪽이 집의 얼굴이다. 그러나 이 집의 대문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집은 개울가 평지에 입지했다. 이럴 경우 집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대문을 높은 솟을 대문을 짓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 집은 낮은 평대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노비들의 주택(가랍집)을 앉혀서 오히려 대문채를 감추었다. 대문을 들어가도 공수간(청지기의 가랍집)이 드러날 뿐 살림채가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중문을 열면 담으로 막힌 면이 나타나고, 살림채로 들어가는 문은 잘 안 보이는 옆면에 조그맣게 설치되었다. 남쪽 정면은 낮추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 집의 실질적인 정문은 따로 있다. 중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신기한 골목이 나 있다. 분명 안으로 들어 왔는데, 양옆이 모두 담장이니 이 길은 바깥인 셈이다. 이 골목을 따라가면 자계 개울가로 나오게 되고, 여기서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된다. 별당인 독락당과 뒤편의 계정이 계곡과 어우러져, 전혀 의외의 절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이 집의 실질적인 정면이다. 이 동쪽 면은 자연에 대해 열려 있고, 건물의 형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독락당 쪽의 담장은 가운데 살창을 만들어 일종의 투명 담장을 갖추었다. 담장까지 개방하여 독락당 안에서 자연을 감상하도록 한 것이다. 

  이 집은 두개의 정면을 갖춘 이중적인 주택이다. 형식적 정면은 낮추고 감추어 인간 세상과 격리되는데 비해, 실질적인 정면은 드러내고 열어서 자연과 하나를 이룬다. "인간 세상은 닫고 자연을 향해 연다" 이것이 이언적이 추구한 '독락'의 은거 생활이며, 독락당은 은거를 위해 설계한 맞춤형 주택인 것이다.

  

 집은 곧 인격, 무첨당과 향단

독락당에서 자연친화적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이언적은 고향에 두 개의 건축물을 더 남겼다. 하나는 본가에 건립한 별당인 무첨당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대신해 노모를 봉양하는 동생을 위해 지은 향단이라는 대저택이다. 이언적의 본가는 양동마을 골짜기 높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작고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평범한 살림집이었다. 그는 이 집 옆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별당 건물을 짓고 무첨당이라 이름 붙였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ㄱ'자로 걱은 이 건물에는 두 개의 마루가 있다. 세 칸의 대청마루는 제사와 같은 큰 모임을 갖는 곳이고, 한 칸 돌출된 누마루는 마을의 경치를 내려다 보며 즐기는 곳이다. 무첨당의 구조와 장식은 견고하고 섬세하여 높은 격식을 갖추었다. 소박한 살림채와는 대조적으로 당당하다. 아마도 은거를 끝내고 정계에 복귀해 국정을 주도하던 이언적의 자신감을 표현한 건물이 아닐까.

 

 집안에 큰 향나무가 있어서 이름 붙은 향단은 독특한 모습의 살림집이다. 마을의 첫 번째 봉우리 중턱,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 잡았다. 또한 높은 세 개의 지붕 면이 나란히 높여 매우 특징적인 형태를 이룬다.  양동마을에 있는 100여채의 집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집을 꼽으라면 단연 향단이다. 이 집의 몸채를 하늘에서 보면 '日' 자 모양이다. 두개의 안마당이 있는데 하나는 안대청에 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엌을 위한 작업 마당이다. 두 안마당은 사방을 건물과 지붕이 감싸고 있고 규모가 작아서 매우 아늑한, 방 밖에 있는 방, 천장이 뚫린 방과 같다.

 향단의 대청은 넓은 마당과 그 앞의 산을 향해 시원하게 자리 잡았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마당의 향나무와 앞산은 정말 호쾌하다. 반면 안대청은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도록 높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안대청에 앉으면 아래로는 행랑채의 지붕을, 위로는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사랑채는 산을, 안채는 하늘을 본다. 아마도 이언적은 이 집을 지으면서 사랑채의 동생에게는 산의 경관을, 안채의 어머니에게는 하늘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언적이 남긴 세 점의 건축, 독락당과 무첨당, 그리고 향단은 한 사람의 작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다르고 독창적이다. 그가 처했던 정치적, 사회적 입지가 달랐던 시기에 지어졌고, 건축의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언적은 위대한 성리학자였을 뿐아니라, 여러 면의 인격과 심정을 건축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안목과 재능을 겸비한 건축가였다.


  김봉렬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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