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답사 옥산서원..

 

보통 은행나무는 건물의 앞에 심는데 옥산서원은 공간이 좁아서 옆에 심은듯..

크기가 만만치 않지요...

옛 선비들은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서원이나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요 .. 행단의 행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행 이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를 심는다고 하네요

 

 

 

 

옥산서원은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즉 봉황이 날개를 펼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형세의 자리 라고 합니다.

서원의 누마루에 문이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하는데 봉황이 들어온 집은 닫힌 공간이 되어야 하기에

누마루에도 문을 달았다고 해석을 합니다.

 

무변루(無邊樓)

보통 현판은 앞에 걸리는데 대청마루를 지나 뒤에 걸려 있네요

한석봉의 글씨라고 합니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  라는 뜻이라고..

옥산서원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납청루(納靑樓) 였다고 합니다.

 

 

 

 

건물의 배치를 보면 강학당과 양쪽 건물의 지붕사이에 공간을 없앤것도 비봉귀소형이기 때문이라고..

 

강학당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옆에 작은 글씨로
萬歷 甲戌 賜額後 二百六十六年己亥失火改西 宣賜 (만력갑술사액후이백육십육년기해실화개서선사)

라고 쓰여 있다.. 사액후 266년 지난후에 썼다는 것이다.

 

강학당 안에서 밖으로 바라보게 되면 또하나의 현판이 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鵝溪 李山海(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舊額模揭(구액모게)라고 옛것을 다시 새긴것이다. 라 적혀있다.

아계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로 어렸을때 부터 토정에게 학문을 배우고 6세 때부터 글을 썼다고 한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대감 이덕형이 아계의 사위이다. 

한음은 옥산서원에 오기전 답사를 갔던  영천 광주이씨 시조묘의 주인인 이당의 후손이다.

 

 

 

 

 

강학당인 구인당의 글씨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옥산서원의 강학당에서 가장 높이 걸려 있는 편액은 무엇일까?

사액서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현판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건물중심의 종도리 부근 가장 높이 걸려 있는 편액이 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옥산서원에 내린 내용이라고 한다..(나중에 자세히 살펴봐야..)

그러니 서원생들이 감히 함부로 할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옥산서원의 규율이 가장엄했다고 하고

그런 규율때문에 서원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편찬된 우리나라 최고의 정사인 삼국사기도 여러차례 판각이 되었는데..

현존하는 완질본은 4차로 판각된 것으로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함.

 

삼국사기 정덕본  보물 제525호

50권 9책. 목판본.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것이다. 명나라 무종,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간행된 보물 제723호와 동일한 판본인데, 권수부분에 모필로 쓴 ‘(만력원년월일옥산서당)’이라는 기록이 있어 1573년 경주부에서 찍어내어 옥산서원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질본의 ≪삼국사기≫이나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보물 제723호가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질본이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 [三國史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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