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며, 선비들이 모여서 명현(名賢), 또는 충절(忠節)로 이름 높은 위인들을
받을어 모시고 그 덕망과 절의를 본받으며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던 곳으로 조선의 역사에서 철학과 사상이
담긴 중요한 건물이다.
자연의 이치를 중시하고 자연 속에서 만물의 이치를 찾고자하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에 주로 건축하였다. 서원 건축에서 누(樓)마루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서원의 형태는 명분을 중시하는 영남학파 계열의 서원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완전한 좌우대칭을 중시
하는 건축 형태를 디고 있으며( 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덕천서원,도동서원),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기호학파계열의 서원들은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건축 구조를 하고 있다.( 월봉서원,
심곡서원,자운서원,돈암서원 등)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를 그대로 사용하였기에 정형화된 서원 건축의 기준은 될수 없었다.
(불교문화에서 유교문화로 넘어가는 문화의 교체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함양의 남계서원을 건립 할때 퇴계 이황이 제향(祭香)기능보다 강학(講學)기능을 중시하는 전학후묘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서원은 철저하게 유학의 정명주의(正名主義 : 반드시 올바른 명분이 있어야 행동으로
옮길수 있다)와 성리학의 이(理)를 중시한 영남학파의 사상적 특징으로 중정과 좌우대칭을 중시하는 엄격한
규격에 의해서 대부분 비슷한 건축 형태를 보이나 정암 조광조, 고봉 기대승, 사계 김장생, 율곡 이이 ,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기(氣)를 중시하는 기호학파(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사상)계열의
서원에서는 특정한 구도에 얽매이지 않는 건축 형태를 띠고 있다.
성리학적 사상에 따른 건축의 형태는 일반 살림집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사대부집이라도 경기도나
충청일부 전라도 지방의 고택과 영남지방의 고택의 구조나 배치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시대의 사상이
건축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경우이며,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해할 수 없으면 고택의 형태나 구조를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다.
서원건축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 풍수논리로 터를 잡고 풍수 법칙에 따라 간(間) 잡이
(설계) 되었다. 서원을 건축할때 풍수논리를 적용했던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층이던 사대부들이었다.
글래서 서원풍수에서는 당시 지식층의 선비정신을 읽을 수 있다.
최근의 서원에 대한 문화재 답사 설명은 유교예제와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본질을
이루고 있는 풍수논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결국 우리는 서원에서는 유교 일변도 사찰에서는 불교
일변도식의 문화재 답사만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와 문화재를 반쪽만 보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서원은 유교의 이념과 풍수지리의 논리가 공존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유교는 유교 예제양식을
창출하였고 풍수는 인걸지령(人傑地靈 : 걸출한 인물은 신령스러운 땅의 기운에 의해서 태어난다)을 담으려
했던 잣대였다.
서원의 터를 정할 대는 마을이나 고을에서 약간 벗어나고 산세가 부드럽고 지기가 강하며 산수가 빼어난
곳으로 산은 사람을 인자하게 하고 물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는 이치에 따라 특히 주변에 빼어난 산이 있는 곳을 선호 하였다.
건축을 할때는 지맥선가 건축선을 살피게 되는데 건축선은 지맥선을 살펴서 정해진다. 서원 건물은 철저
하게 지맥선을 따라 사당과 강당이 자리 잡게 되며 우리나라의 산지지형의 특성상 일자형 배치가 많지만
사선배치(덕천서원,병산서원등) 평지에서는 횡렬식 배치(오봉서원,수림서원,임천서원,회연서원,돈암서원등)
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아무리 고귀한 유교예제의 논리나 고준한 지혜가 담긴 풍수지리의 논리 일지라도 땅의 논리 즉
자연의 논리를 우선할 수 없다는 의미다.
터가 정해지만 산 사람을 위한 양택 건물은 앞에 보이는 자연경관을 중시하고 죽은 자를 위한 음택 건물은
산의 기운을 중시한다는 생전사후의 원칙에 따라 사당과 강당의 위치가 정해지며 음택인 사당과 양택인
강당이 좌향(坐向)을 다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천의 덕천서원)
초기 서원의 형태는 제향기능 보다 강학을 중시하는 앞에는 강당 뒤에는 사당이라는 전학후묘의 원칙과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에 배치된 강당 중심 서원으로 세워졌으나 그 후 제향기능을 중시하면서 동재와
서재가 사당 앞에 배치된 사장중심의 서원도 세워지게 된다( 필암서원,덕양서원, 덕봉서원, 용연서원,
심곡서원등)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이것을 양택서원과 음택서원으로 구분한다.
또한 서원은 철저한 음양의 논리에 따라 건물에 고도로 계산된 정(靜)과 동(動)이라는 음양의 이치가 담겨
있어 자연스럽게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설계된 건물이 서원 건축물이다.
서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 그리고 누(樓)를 중심으로 한 산수공간
으로 구분되며 그 중심은 강학 공간이었으며, 서원의 관리를 위하여 서원 옆에 짓는 고직사(庫織舍)는
서원에서 배향하는 위인이 생전에 거주하던 곳과 반대쪽에 배치하여 위계를 분명하게 하였다.
서당이나 서원 같은 강학공간에 있는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때 은행나무 (실제는 살구나무)
아래서 가르친 후로 유학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고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그 곳이 강학 공간임을 상징한다
또한 나무의 자라는 모습이 위로 곧게 뻗어가기 때문에 곧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연못에 심는 연꽃은 주의 스승이며 북송오자(北宋五者 : 주돈이, 정명도, 정이천,장횡거,소강절)중 한사람인
주돈이가 " 진흙탕속에서도 고고하게 꽃을 피우니 연꽃은 오염되지 않고 요염하지 않으며 향기가 은은하고
멀리 미치니 꽃 중의 군자고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다." 라고 비유한 후부터 유교문화에서의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게 되었고 선비들이 머무는 공간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거나 건물의 부재에 연꽃의 문양이나
형상을 새기기도 하고, 묘소 앞의 양쪽에 세우는 망주석(望柱石)의 머리 부분을 연꽃 봉우리 형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서원의 유래는 중국 당(唐)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 서원에서 유래 되었
으며 (세종 때 설치된 집현전도 여기에서 유래) 선현의 제사와 교육기능을 갖춘 본격적인 서원은 송(宋)나라
때부터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의 명칭은 세종 때 이미 쓰이고 있었다. 김제의 정곤, 광주의 최보민, 평안도의
강우량 등이 사사로이 서원을 세워 교육한 공으로 포상 받은 적이 있었고 경상도 단성(현재의 단청)의 도천
서원 , 성주의 천곡서원, 전라도 부안의 도동서원에서 각각 문익점,김굉필,김 구 등을 제사 지내고 있었으나
이들 서원은 제향기능과 강학기능을 함께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의 시초로 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542년(중종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불타버린 숙수사(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금성대군과 많은 유생들이 죽임을 당할때 불탔음)터에 고려 충렬왕16년(1290년)에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가
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새로운 이론에 매료되어 주자전서의 복사본과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그려서
귀국하면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소개한 회헌 안향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선비들의 자제 교육
을 하면서 주자가 강론을 하던 백록동 서원을 본 따서 백운동 사당이라고 하다가 1545년에 백운동 서원이라
하였으며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그 후 명종5년(1550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시설의 확충과 소수(紹修:무너진 유학을 다시
일으켜 닦는다는 소이수지(紹而修之)에서 나온말) 서원이라는 명종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아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 되면 땅과 노비, 서적등을 하사 받았으며 세금과 군역의 면제등 각종 혜택을
받았다. 서원은 제사 목적이 아닌 공부하는 곳으로 등장했던 지금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제사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도학자를 모셔놓은 사당에 지내는 의식 절차에 불과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형원이 "각 고을의 향교가 교육이 잘못되어 과거시험에만 집착하고 명예와 이익만
다투게 되자 뜻있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정사(精舍)를 세워 배움을 익히고 후진을 교육한데
서 서원이 생겼다." 하여 서원의 설립목적이 교육에 있음을 강조하여 선현에 대한 제사기능은 부수적이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를 지나면서 서원의 난립과 초기의 교육적 기능보다 제향기능 위주로 변질되면서 서원 본래의
기능이 후퇴하면서 문중이나 가문의 권위를 내세워 부패의 온상이 되고, 그 폐단이 심각하여 고종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전국47개의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 되었으나 그 후 20세기 초반에 절반정도가 복원됨
서원철폐의 기준은 어떤 인물이라도 한곳의 서원에서만 배양 하도록 하고 사액서원이라도 예외 없이 철거
되었다. (경주의 서악서원은 세명을 배양하였으나 신라시대의 인물들이라서 예외로 인정되었음)
현재의 우리가 우리문화를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풍수라는 우리전통 시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수가 무덤자리나 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풍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편견을 버리면 우리
고유의 자연과 합일을 이루고자 했던 우리 것들이 보일 것이다.
서구문화 시각으로 우리문화재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발상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우리 문화재는 그 당시
선조들의 시각으로 현존하는 문화재를 바라보는 것이고, 그 시각중 하나가 풍수 였고 이는 어떤 시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본질을 이루는 전통 시각이었다.
전통서원에는 사대풍수로 채워진 것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풍수시각을 떠나서는 그 본질을 읽어 낼 수가
없다. 우리의 전통시각은 건축은 시대를 담고 집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그 집이 담은 자연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성정(性情)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집을 짓지 않았으며 건축을 할때는
가장먼저 그 곳의 자연 조건 즉 땅의 논리를 살피고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특징) 다음은 풍수지리의 논리를 따지고, 그 다음은 종교나 그 시대의 사상을 구현하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취향을 건축에 담는다. 살 집이라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짓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니 문화재를 답사 할 때는 역사와 시대적 사상 종교와 철학 그리고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
야만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까지 살필 수 있다.
위덕대학교 평생교육원 전통풍수지리 교수 손 전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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