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정기답사
1. 일시: 09월 13일 (토) 09:00 ~ 18:00(예정)
2. 장소: 포항상공회의소
3. 코스: 포항 → 남평문씨세거지 → 현풍향교 → 현풍포교당 → 용두(2기) → 유가사 → 용연사 ->포항
1. 남평문씨세거지
대구에는 팔공산과 비슬산이라는 큰 산이 있어 봄철에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현풍의 대니산 자락과 비슬산 자락의 옥포 용연사 계곡을 거쳐, 화원의 인흥마을에 자리한 남평문씨 세거지(이하 세거지)를 얼마 전 답사하였다.
남평문씨 세거지는 인수봉 아래 한옥촌을 이루고 있다. 건물마다 사람이 실제 생활하고 있고 문중에서 잘 보존하고 있어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답사하는 곳이다. 대구시티투어 버스가 다녀가기도 한다.
세거지는 널리 알려진 곳이어서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화원읍에서 비슬산 방향으로 골짜기를 향하면 들판이 나오고, 본리 마을 입구 왼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 방천에는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고, 왼편 논가에 마을을 수호하는 상징물 같은 탑 모양의 돌무더기가 있다.
세거지 마을은 9채의 주거공간과 재실 2곳, 문고 2곳 등 크고 작은 60여채의 건물들로 짜여 있다. 일일이 답사하여 모두 소개하려면 원고량이 많아지기에, 간략하게 수백당과 광거당, 인수문고·중곡서사·거경서사를 중심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① 수백당(守白堂), 수봉정사
수백당은 세거지의 중심에 위치한 건물로 1936년에 지은 건물의 당호이며, ‘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다. 수봉 문영박(1880~1930)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수봉의 아들 5형제가 합심하여 세운 건물이다. 수백당은 마을 정면에 위치하여 방문객을 맞이하거나 문중 모임, 공사간의 모임을 가질 때 사용하는 주요 건물이다.
수백당 왼편에는 언덕처럼 흙을 쌓아 만든 석가산(石假山)에 전나무와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가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당의 소나무 아래에는 자그마한 돌에 재미있게 새겨진 거북 문양이 있고, 대문의 빗장도 거북 모양으로 달아 두었다. 아마도 집을 지을 때 실용·장식성과 함께 거북의 상징성을 떠올리면서, 거북처럼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에 마루 2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고, 우측면 마루는 전면의 마루보다 한자 반 정도 높게 하고 측면에 난간을 두어 누마루 형식을 취한 독특한 구조이다.
수백당에는 여러 개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건물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사람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면 함부로 짓지 못하듯, 건물의 이름도 되는대로 이름 하여 걸어두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세거지 건물 곳곳에 걸려 있는 수많은 당호와 편액은 필자에겐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실제 작년에 이곳의 편액과 주련을 탁본하고 자료집을 만들면서 당대 편액을 건 주인의 성력(誠力)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재 걸린 당호 글씨는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1870~1935)이 썼으며, 예서체로 결구미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예전에는 오세창 선생이 쓴 ‘수봉정사(壽峯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 외의 편액으로, 중국 명나라 때 서예가인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로 된 사백루(思白樓)와 이청각(履淸閣), 영남의 거유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쓴 수백당, 위창 오세창이 쓴 ‘경유당(敬遺堂)’, 추사의 글씨 ‘쾌활(快活)’이 걸려 있고, 기둥에도 주련 4폭이 있다.
수백당 마루 밑에 작은 비석이 있다. 후일 답사하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비는 수봉의 송덕비다. 송덕비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비는 세워져 있지 않고 마루 밑에 그대로 두게 된 사연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인흥에 출입하던 행객들이 어른의 인품과 덕행에 감화되어 돌아가시던 해에 세운 비석이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수봉이 알고 즉시 철거하게 했다고 한다. 비석의 내용에 어른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의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니며, 인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것은 참된 인이 아니다. 도모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인의를 행하셨으니 이분이 바로 만권당 주인이 아니겠는가(以義謀利者非眞義/以仁要譽者非眞仁/不謀不要而爲仁義/是萬卷堂主人耶)’
② 광거당(廣居堂)
광거당은 세거지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910년에 건립하여 후손의 교육장소로 사용되고, 선비 강론의 집합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당의 규모도 크지만 만권의 전적을 소장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거당의 당호 명칭은 맹자의 ‘천하의 넓은 곳에서 거처한다(居天下之廣居)’에서 취하였다.
광거당이 들어서기 이전에 있었던 건물은 1834년 건립한 용호재(龍湖齋)였다. 1910년 용호재를 허물고 확장 개축하여 지은 재실이 광거당이다. 이후 광거당 안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만권당을 건립한 인물은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년) 의 둘째 아들 수봉이다. 후은은 당대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거지의 주거공간과 만권당을 마련하는 기반을 이루었다. 수봉은 광거당을 중심으로 수만은 문사들과 교유했다. 심재를 비롯,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 등이다.
광거당에도 많은 편액과 주련이 있다. 건물 정면에 석촌 윤용구가 쓴 광거당을 비롯하여, 대청에도 중국인 장건이 쓴 광거당 편액이 있으며, 누마루에는 추사가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 적은 편액이 있다. 글씨는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예서체 글씨이며, 원본 글씨는 법첩으로 장정하여 따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연못이 메워지고 없으며, 뜰 안의 대숲과 담장 밖의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운치를 자아낸다.
그 외에 장건의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 수봉이 쓴 ‘아회(雅懷)’라는 편액과 아회의 뒷면에 추사의 글씨인 ‘서복(書福)’이 새겨져 있다.
광거당은 오늘날 사극이나 드라마 촬영장으로 애용되었고, 문중이나 외부의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멋진 공간이다. 주위에 산재한 고건축물은 그저 바라만 보는 공간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광거당처럼 적극 활용되고 있는 공간으로 유지해가는 방향은 바람직한 일이다.
③ 인수문고(仁壽文庫)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의 공터에 지은 문중서고다.
인수문고는 만권당의 서적과 규장각 도서를 포함하여 1만여권의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모아서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인수문고 옆에는 1993년에 지은 ‘중곡서고’가 있다. 중곡서고는 수봉의 손자인 중곡 문태갑(文胎甲)옹이 평생 모은 근·현대의 서적을 보존하고, 인수문고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서고다. 거경서사는 두 문고의 서책을 열람·담소·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문씨가 17년간 접빈하며 독서생활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 문중이 개기(開基)하여 가문의 문호를 흥성시키고 유지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문중 구성원들이 화합·노력하고 재력의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후손들은 수백당과 광거당 뒤편 주거 공간에 살고 있다. 선조들이 이룬 위업을 지키기 위해 종중의 규약을 준수하고 선조의 덕목을 몸에 익혀 실천하는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 (동방금석문연구회장·능인고 교사)
2. 용연사
용연사 유래
비슬(琵瑟): 고대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며, 신라시대 포산이라 불린 이곳에서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 권5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실려 있다.
근처에 옥연지가 시원스럽게 펼쳐져있는데, 이 연못에 신령스러운 신룡이 살았다고 해서 용연사라 했다고 한다.
옛날 못 속에 일곱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서로 승천하려고 다투며 농민을 괴롭혀 용왕의 아들이 용을 잡으려하자 네 마리는 도망을 가고 세 마리는 잡혀 죽자 사람들이 죽은 용을 위해 용왕재를 지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용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서기 914년(신라 신덕왕 3) 청도 운문사를 중건한 보양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뒤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보양선사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의 초청으로 용궁에 가서 가사를 보시 받고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을 시봉으로 얻어 와서 가물 때 비를 내리게 하였다고 한다.
1419년(조선 세종 1) 천일(天日)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1603년(선조 36) 탄옥(坦玉)·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범종각을 지었으나 1650년(효종 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1655년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1670년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으며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1722년(경종 2)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하였는데, 당시 절 규모는 2백 수십 칸에 이르렀으며 거주하는 승려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 병화를 입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것을 근래에 복원했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자운문(紫雲門)이라는 용연사의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안양루(安養樓)가 나오는데 안양루의 원래 이름은 보광루(普光樓)라고 하나, 근래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안양루를 지나면 바로 극락전이다. 용연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이 극락전(極樂殿)을 본당으로 모시고 있다. 극락전 안의 석가 삼존불은 조선후기 영조 4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① 석조계단(적멸보궁)
용연사 금강계단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통도사의 금강계단, 금산사의 방등계단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 사리탑이다.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진다.
이곳의 석가여래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 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용연사에 봉안토록 한 것이다.
적멸보궁 법당은 다른 보궁과 같이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뒤쪽 벽을 유리로 하여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은 1673년(현종 14)에 완성되었는데, 그 내역은 사리탑 오른쪽에 있는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손하자 사명 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사리를 안전하게 모셔서 금강산으로 가지고 가서 서산 대사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서산 대사는 본래의 자리에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여,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다시 모시도록 했으나 만일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제자 선화(禪和)에게 태백산 보현사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영남 지방이 안정되기 전이어서 미처 통도사에 봉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였고, 사명 대사는 포로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다녀 온 뒤 곧 입적하자 그 사리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얼마 후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이를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본래의 봉안처인 통도사로 되돌려 모셔야 한다는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뜻을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는 통도사에 보내고, 1과만 이곳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고 한다. 1673년에 완성되었으니 통도사 계단이 파헤쳐진 지 80여 년 만에 다시 봉안된 것이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돌려받은 사리함에서 사리 한 과를 꺼내들고 사명대사가 말했다.
“이 사리는 용연사로 모셔라…금강계단도 통도사의 것처럼 만들라”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 자락에 있는 용연사 극락전. 용연사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금강계단, 그리고 사명대사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 절의 일주문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다. 본 절로 가는 길과 적멸보궁과 불사리계단(금강계단)으로 오르는 길이다. 계단 쪽으로 오른다.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이다. 금강계단이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과 같이 단단하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계단에서는 승려의 득도식 등 여러 의식이 치러진다. 용연사 내에서도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자리한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둔 곳으로 유명하다. 사리는 범어의 사리라(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처의 유골을 뜻하는 진신사리와 부처의 가르침과 정신이 깃든 불경을 이르는 법신사리로 구분한다. 이곳에는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상 금강계단 앞에는 적멸보궁이 있다. 부처의 사리가 있는 금강계단을 경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보궁 안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다. 용연사의 적멸보궁 역시 그러하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가 그곳이다. 여기에다 강원 고성 금강산 건봉사, 경북 태조산 도리사와 이곳 용연사의 적멸보궁을 합해 8대 적멸보궁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 만큼 용연사의 금강계단은 성소(聖所)로서의 위상이 아주 높다.
정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원형의 굄대가 겹으로 새겨진 정방형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맨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통이 넓어지다가 중앙부분을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어 절에서 흔히 보는 범종을 그대로 닮았다. 윗부분은 구슬무늬를 한 줄로 빙 두르고 나서 겹으로 된 연꽃무늬를 한 바퀴 돌리고, 그 위로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마무리했다.
상층기단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 면의 가운데 탱주를 새겨 사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상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손에는 갖가지 무기를 든 채 구름을 타고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눈을 부릅뜬 팔주문은 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의 위세나 힘이 넘치기보다는 그 사리를 지키게 되어 마냥 즐겁다는 명랑한 표정이다.
하층기단은 아무런 무늬 없는 장대석을 상층보다 더 두툼하게 이중으로 단처럼 쌓아 마감했다. 하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황상이 하나씩 서 있었으나 지금은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몇 차례 도난을 모면한 뒤 아예 극락전 안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천왕들은 빼어난 조각솜씨도 솜씨려니와 그 표정과 자세의 명랑성과 다양함은 가히 조선시대 돌조각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나설 것이다. 아기들 체구에 가까운 4등신의 몸에 나이 든 얼굴이 벌써 웃음을 자아내는데, 앞니를 두 개만 내보이며 입을 앙다물고 콧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험악한 인상을 지어본다든지, 세 살짜리의 그것만도 못한 주먹을 허리춤에 말아 쥐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본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상층기단의 팔부중상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워지려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넣는 멋진 조각이다.
탑 앞의 상석은 장대석을 두 개 수직으로 세운 위에 수평으로 장방형 판석 하나를 올려 만든 것인데 탑의 기단에서 주는 것과 같이 단순 소박한 인상이다. 그러나 기단에 붙여 사방으로 돌린 12개의 돌난간과 쇠창살은 일제시대에 세운 것이다.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재휘佛日再輝 등을 새기고 모서리에는 만든 해(1934)까지 착실히 적어 놓았다. 탑 앞의 석등도 이때 조성한 것이리라. 보호하고자 했던 뜻은 좋으나 기단부를 답답하게 막아버려 뛰어난 균제미를 이루는 초창 이래의 아름다움을 어그러뜨리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사리탑 앞으로 양편에 부도비와 중수비가 각각 서 있다. 오른쪽의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은 1676년에 바로 이 사리탑을 세우고 나서 그 내력을 밝힌 것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곳 용연사에 청진 대사의 원력으로 석가 진신사리를 모신 연유를 명확하게 알려 주는 기록이면서 그 밖에 통도사와 보현사에도 진신사리가 모셔졌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 곁에 있는 또 하나의 비는 1934년에 사리탑을 중수한 사실을 적은 것으로 화악 사문 김동명이 쓴 것이다. 이때의 사업이 탑 주위로 석주를 두른 것이다.
왼쪽에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가 있다. 1722년에 임수간이 지은 것으로 용연사의 내력을 가장 충실하게 알려 준 기록이다. 전액 대신에 행서체로 크게 ‘비슬산용연사중수비’라고 썼는데 남한명의 유려한 필치가 뛰어나다.
② 극락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식의 맞배지붕건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용연사는 914년(신라 신덕왕 3년) 보양국사가 창건한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는 등 수난을 당하다가 1728년(영조 4) 극락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중건되었다.
근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약 270년 전에 보궁을 건립한 것으로 나타나 1700년대 초엽 사찰의 중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극락전은 전면 기단은 둔중한 화강석 다듬돌을 세벌대로 높게 쌓고, 그 위에 원좌를 둔 자연석 주초를 놓아 흘림과 안쏠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워 지었다.
전면은 창호로 개방하였는데 모두 2단의 궁판을 둔 교살문양의 4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은 전면 협간에만 좁은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고, 배면에는 어간에 띠살 쌍여닫이문을 냈다. 공포는 외삼출목, 내사출목이다.
살미첨차는 길이가 짧고 끝부분이 수직으로 절단된 앙서형으로 윗몸에 연꽃봉오리를 초각하였고, 상부에 운공과 용두를 장식하였다. 배면은 용두 대신 운공과 봉두를 사용하였다. 불전 내부는 우물마루 바닥을 깔고 내진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를 후불벽으로 처리하여 불단을 꾸몄다. 극락전임에도 아미타불이 아닌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봉안하고 후불탱화 역시 미타탱이 아닌 영산탱이다.
천장 구성은 층단반자로 각 층단 벽에는 불벽을 치고 벽화를 그렸으며, 상단 천장은 소란반자로 꾸미고 금단청(錦丹靑:부재 양 끝에 머리초를 그리고 중간에 무늬를 넣은 단청)을 올려 매우 화려하다.
불단 상부는 보개를 얹고 운각과 용을 장식하여 장엄하였다. 배면기둥과 대들보에 시주자의 이름을 오목새김하였고, 외측면의 박공 안쪽에 별기화를 그린 반자로 장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전각은 18세기 다포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내부 단청의 뛰어난 기법과 고아한 벽화의 수법 역시 수작으로 평가된다.
Ⓐ 후불탱화(영산회상도)
후불탱은 극락전에 걸려야 할 미타탱이 아니라 대웅전에 있게 마련인 영산탱이다. 화기에는 영조 7조(1731)에 영산대법회탱을 비롯한 5폭의 탱화를 그려 대웅전과 영산각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존불 또한 문수‧보현 두 보살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이다. 그렇다면 이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대웅전인 셈이다. 이 점은 삼장탱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그 화기에 법장암에서 그려 본사, 곧 용연사 대웅전에 걸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이상으로 미루어본다면 현재의 극락전은 본래 대웅전이었으나 어느 땐가 무슨 곡절 끝에 극락전으로 현판만 바뀐 듯하다.
후불탱화는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를 비롯한 몇몇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씨는 나이 열셋 되던 1727년에 아홉 살 난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사별했다. 그러니까 세자의 3년 상을 끝내고 그의 천도를 위해 이 영산탱을 시주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여인으로 치자면 아리고 기막힌 사연이겠으나 아무튼 이러한 황실의 뒷받침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 솜씨도 남달라 청록의 고운 색감, 양 보살의 투명한 두광 표현, 다양한 표정의 섬세한 얼굴 모습 그리고 다채로운 의복 표현 등이 짜임새 있게 자리 잡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 삼장탱화
1744년 달성 비슬산 용연사 극락전 삼장탱에 참여한 화원은 수탄, 명준, 각혜, 자환, 근헌 등 5명이다. 수화원 수탄은 구룡사 감로탱과 불영사 연산탱을 그린 수탄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수탄 다음인 명준의 이름이 불영사 영산탱 화기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들 중 자환은 팔공산 운부사(현 운부암) 출신으로 1747년에 운분사 지장탱을 그렸다. 그래서 용연사 삼장탱 중 지장보살 부분과 운분사 지장탱은 성중들의 상호가 유사하다. 근헌 역시 운부사 출신으로 같은 해 직지사 대웅전 삼세불탱에 참여하였다.
용연사 극락전에는 1731년에 영산탱을 걸었고 화원은 허심, 현일, 찰연 등이고 ‘도화공’은 수열이며 시주는 지운이 했다고 한다. 영산탱의 보살들은 얼굴은 작고 몸은 늘씬하게 표현된 팔등신 형상으로 이런 체형은 1732년과 1741년에 통도사에서 임한이 그린 탱화의 특색인데 용연사 영산탱의 보살들도 그에 못지않게 세장하다. 그리고 이런 팔등신 체형이 13년 후에 같은 절의 삼장탱 성중 체형에 영향을 주었다.
구성은 남장사 작품과 유사하지만 차이점은 지지보살 수인이 설법인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용연사본이 기존 팔공산 지역 삼장탱 도상을 되살린 결과이다. 반면 천장보살 지물인 약호는 남장사 삼장탱과 같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천장보살 좌우협시 두 천이 정면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뀐 것은 3년 전 여수 홍국사 천장지지탱의 경우와 같은 변화이다. 반면 성중은 대부분 천장보살을 향해 있다. 천들 뒤로 선인과 성군이 뒤섞였는데 지기중과 명부중도 같이 자리하였다. 그런데 많은 구름 때문에 흡사 성중들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남장사 삼장탱에서 이미 보았던 모습인데 구름이 훨씬 많아졌다. 그 결과 권속들이 한데 뭉쳐 있기 보단 흩어져 있어서 산만하다.
화려했던 보살 보낭문양이 점무늬로 간략화된 것은 양식화 현상이고 천장보살 신광 무늬도 남장사본처럼 점무늬로 단순화시켰다. 원래 보낭 장식으로 들어가던 꽃 덩굴 무늬는 지지보살 신광 무늬로 쓰였고 그 결과 지장보살의 무늬 없는 녹색 신광과 비대칭이 되었다. 지기중 가운데 흰 수염을 달고 있는 용왕이 해와 달을 양손에 들고 있어 용왕과 아수라 도상이 합쳐졌는데 수탕이 참여한 불영사 영산탱(1735년)에서도 이 같은 모습의 아수라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 백의관음도
Ⓓ 팔상도
③ 삼층석탑
극락전 앞에 단탑으로 설치된 석탑으로서 근년에 보수되었고 단탑기단에 옥신, 옥개를 각각 단석으로 한 삼층석탑이며 노반만 남아있다.
기단부는 지부석이 보수때 새로운 석재로 대치됐고 면석은 탱주 한 개와 우주 두개씩을 각출하였으며 갑석은 부연과 2단의 괴임을 각출하고 상면을 외연쪽으로 경사 지웠다.
각층의 옥신은 우주 두개씩을 각출하고 옥개 4단의 받침과 괴임을 각조 했다. 단층기단에 갑석상면이 경사를 이루고 옥개 받침이 4단이라는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은데 비해 받침이 높은 형식 등은 석탑에서 변질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④ 윗부도전(적멸보궁 등지고 우측 일각문 밖)
낙파대사, 원계대사, 인악대사, 동운대사, 송파대사: 5기, 무명: 2기. 부도비: 2기
⑤ 아랫부도전(문 밖 100m 내려가서 개울 건너면 우측 산록) -
무위당대사, 서귀당대사 치청, 반허당 법찬, 현진당 대숙.
3. 현풍포교당: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 27길 54-6
① 현풍초교 석탑재 중 옥개석 3매/초층탑신/상층기단면석/갑석/하기단갑석/면석
② 시주비: 1637년
4. 현풍향교
이 곳은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임진왜란 후 현감 이영도(李詠道)가 구(舊)교동에 중건하였다가 1759년(영조 35) 현감 김광태(金光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1년에 현감 허고 등이 중수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달성군의 관할이 되었다. 1931년 군수 신현구(申鉉求) 재직시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 등을 중수하였다.
1969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1974년에 대성전·명륜당 및 단청을 보수하였으며, 1975년에 동무·서무를, 1978년에 내삼문을, 1979년에 외삼문을 각각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각 4칸의 동무와 서무, 각 4칸의 동재와 서재, 내삼문 등이 있다. 명륜당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영조 때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김광태를 기리는 기적비가 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절터였다. 그래서 건축 곳곳에 사찰건물의 부재를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당시 이곳에 향교를 지을 때 부근 절터에 있던 탑재들을 가지고 와서 사용했는지, 아니면 재활용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멀쩡한 탑을 무너뜨려서 썼는지, 아니면 무너진 것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부재가 쓰였다. 그것도 주로 대성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대성전 기단의 연꽃무늬가 새겨진 배례석도 눈에 띄고, 안상무늬가 큼직하게 새겨진 탑의 기단 면석도 눈에 띈다.
대성전 건물의 주춧돌로도 쓰였다. 주춧돌 가운데 석등 하대석도 있고, 석탑 부재도 있다.
다른 곳도 아닌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을 모신 곳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석탑 일부를 사용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 불교를 멸시했던 유림들로서는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좋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잘 모르긴 해도 옛 성현들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신 것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5. 용두:
① 천수암
② 용화사
6. 유가사
절의 창건에 관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765~780년,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827년, 신라 흥덕왕 2년에 도성(道成) 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일연 스님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승려이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기 도의 선사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를 거점으로 일으킨 산문이다. 도의 선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원조로 꼽힌다. 선종의 흐름은 고려시대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유가종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일연스님이 있었다.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나 유가사가 있는 지명인 유가면에서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비슬산은 그 이름에서도 신비로운 냄새가 난다.
신라시대 인도 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비슬(琵瑟)'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비슬은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포산'이라 했고, 지금도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포산을 쓴다.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의 본관이 바로 포산인데, 유가면 바로 옆 현풍면을 이른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주(註)를 남겨 "그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소슬'과 '비슬'은 통하는 바가 있다. 소슬은 '솟다'에서 왔고, 비슬은 '(닭)벼슬'에서 왔다. 둘 다 우뚝하다, 둘레에서 가장 높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비슬산은 둘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겼다.
① 국사당: 봉청비슬산내국사지신위(奉請琵瑟山內局司之柛位)
국사당은 사찰 경내를 수호하는 외호신장을 모신 곳이다. 서낭당, 장군당, 영신당 등의 신당보다 한 단계 높은 신당으로 ‘상당’이라고도 불렀다.
원시 신앙의 구심점인 천신 신앙에서 발생한 것으로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정에 국사를 모셔 놓고 지역 수호신으로 섬겼다. 이러한 원시 신앙이 뒤에 들어온 불교, 유교와 타협하면서 발전하여 온 것으로 여겨진다.
유가사 국사당 천장에는 ‘同治十一年(동치십일년)’이라는 정확한 묵서들이 남아 있는 걸로 봤을 때 1827년에 제작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② 유가사석조여래좌상
1976년 중창한 정면 측면 각각 1칸씩의 용화전에 모셔져 있었으나 지금은 보호각 안, 야외에 모셔져 있다.
불상과 대좌가 모두 같은 석질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얼굴 전면과 양 무릎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 모양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는 뚜렷하지 않다. 어깨는 각이 지고 힘이 들어가 있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우견편단으로, 상반신은 가슴을 크게 열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길상좌를 하고 있는 오른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법의 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형태면에서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계열의 불상으로 볼 수 있으나, 불상의 어깨가 좁아지고 가슴의 탄력이 감소되는 등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대좌도 방형으로서 10세기 이후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③ 삼층석탑
유가사 삼층석탑은 원래 서북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원각사 터에 있었으나 1920년 탑재를 수습하여 유가사로 옮겼다. 높이 364미터로 쇠로 만든 탑 꼭대기의 찰주가 삼지창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이채롭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을 아주 완벽하게 100% 재현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현재 삼층석탑의 보존과 가치평가를 위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범종루 주련의 글귀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캄캄한 무간지옥 모두 다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리고파도산) 삼도 고통 여의고 도산지옥 부서져서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 다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願以此功德(원이차공덕) 원컨대 이 같은 모든 공덕
普及於一切(보급어일체) 중생들께 회향하니
我等與衆生(아등여중생) 저희들과 중생들이
當生極樂國(당생극락국) 극락세계 왕생하여
同見無量壽(동견무량수) 무량수불 친견하고
皆共成佛道(개공성불도)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당전의 둥근 달과 같은 용모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옥호의 금색광명 허공을 비치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만약 사람이 일념으로 명호 부르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잠깐 사이에 무량공덕 원만히 이루리라.
산신각 - 비슬산 유가사 산신, 정성천왕(靜聖天王)
비슬산 정상은 천왕봉(1,084미터)이며 명산이라 오랜 옛날부터 산신이 주석했다고 전해집니다.
비슬산 산신 정성천왕은 꿈을 꾸었다. 성인들이 비슬산의 골과 등성이는 물론, 봉우리마다 깃들여 빛을 발하는 꿈이다. 셀 수 없는 성인들은 비슬산 정상의 봄 진달래처럼 아름답게 산을 장엄했다. 꿈이지만, 정성천왕은 그 꿈이 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되는 걸 보고 싶어 했다.
때는 가섭불 시대. 정성천왕은 부처님 앞에서 맹세했다.
‘발원하나이다. 지금 바로 성불하지 않고, 앞으로 이 산에서 1천명의 성인이 나올 때까지 성불을 유보하겠나이다. 이 산중에서 나온 1천의 성인을 보고난 다음에야 성불하여 남은 과보를 받겠나이다.’
산은 예부터 비슬 또는 포산(苞山, 또는 包山)으로 불렸다. 범어의 발음을 그대로 음기해서 비슬산이라 했다. 또는 비슬의 한자 뜻이 포(苞)라 해서 포산이라 붙여졌다고도 한다. 수목에 덮여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고려 중기 일연이 살았던 때까지만 해도 이 산에는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 등 아홉 성인의 행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연은 그들의 삶을 찬양하고 꿈꾸었다.
『삼국유사』
비슬산 산신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부처님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은 후 발원 맹세하였다. “비슬산에서 1,000명의 수도자가 출현하기를 기다려 그 남은 과보를 받겠습니다.” 산속에서 일찍이 아홉 성인의 유사를 기록한 적이 있는데 지금 그 내용은 자세하지 않으나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무릇 홍수, 가뭄, 질병이 있을 때 정성천왕께 빌면 그 소원을 들어주시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여지도서』
비슬산 천왕봉에 계신 정성대왕은 매우 영험하여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주시니, 신라 이래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 일연스님(스토리텔링)
한 젊은 승려가 비슬산에 들어왔다. 바로 전, 개성에서 치른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장원급제에 해당하는 상상과에 합격한 스물 두 살의 젊은 승려 일연이었다. 그는 보당암에 머물었다. 보당암은 비슬산 정상부근의 대견사로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일체의 세속적 잡념을 끊고 참선 삼매에 들기를 계속했다. 아홉 해를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세상의 어지러움이 절간을 흔들기 일쑤였다. 1236년 몽고의 침입으로 남쪽까지 병화에 휩싸였다. 그는 중생들의 고통을 느꼈다.
“이 전란 통에 중생들은 쫒기면서 배고픔과 죽음에의 공포로 나날을 보낸다. 너무 가엽지 않은가? 이들을 구제할 기도를 드리는 게 나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문수보살에게 기도하면서 친견할 수 있기를 빌었다. 문수보살의 가피력으로 전란의 불안을 이겨내고, 그 힘으로 중생을 위한 기도를 더해갈 생각이었던 게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그의 앞에 섰다. 빛에 싸인 몸. 문수보살이었다. 일연은 감격하여 합장을 했다. 문수보살은 그에게 말했다.
“무주(無住)에 있다가, 내년 여름에는 이 산의 묘문암에 거처하라.”
피난처를 일러준 게다. 일연이 절하고 얼굴을 드니 문수보살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보당암 북쪽 켠의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전히 참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두는 ‘생계불멸, 불계부증(生界不滅, 佛界不增: 현상세계는 줄지 아니하고, 본질적 세계는 늘지 아니한다)이었다. 그는 화두를 철저하게 궁구하면서 용맹정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소식이 왔다. 깨달음을 얻은 게다. 그는 주위 사람에게 소식을 얻어낸 기쁨을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삼계(三界)가 꿈같음을 알았고,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거리낌이 없음을 보았다.”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부모에 의해 전라도 무등산의 무량사에 의탁되어 공부를 했다.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간, 최초의 고행 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과묵하면서도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총명한데다 늘 반듯하게 앉아서 저녁시간을 다 보내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 할 정도였다. 열네 살이 되자 강원도의 설악산 기슭인 진전사로 보내져 비로소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는다. 또다시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간 것이다. 설악의 영봉이 보이는 곳이었다. 진전사는 나말여초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이 비롯된 곳이다. 가지산문의 제자가 된 그는 여러 선문을 거치면서 이십대 초기에 벌써 이름이 널리 알려져 구산문 사선(四禪)의 우두머리로 추대됐을 정도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만에 비슬산에서 비로소 큰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그는 이 깨달음이 자신의 철저한 공부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비슬산의 큰 기운이 작용한 탓이라 여기기도 했다.
그는 비슬산의 곳곳을 돌아보며, 큰 산의 기운을 마음껏 받았다. 44세 때 남해 정림사로 옮기기 전까지 거의 20여년을 비슬산에서 보냈다. 비슬산에는 곳곳에 절이 번성했다. 그가 머물렀던 보당암은 물론, 산 북쪽 켠의 용연사와 유가사, 소재사, 용천사 등과 암자가 즐비했다. 때로는 도성바위 아래 도성암에서 출발하여 관기봉 아래의 관기암까지를 걷기도 하고, 대견봉의 암자에 머물기도 했다. 이들 암자는 아득한 옛날부터 자주 소통되어 뚜렷한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너른 산정의 길은 구름 속으로 난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을 오고가면서 이 지역에 전해오는 도통 이야기와 도인들의 얘기를 적어놓기도 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그의 불세출의 명작으로 꼽히는 ‘삼국유사’에 실린다.
일연은 남해에서 10년을 보내며, 정림사에서 대장경 간행사업을 3년 동안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강화도 선월사를 거쳐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잇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남쪽의 오어사를 거쳐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온다. 인홍사(仁弘寺: 비슬산 북편, 현 남평문씨 세거지)의 주지가 되어서였다. 그는 인홍사를 중수하고 경내를 넓혔다. 이를 조정에 아뢰자 원종임금은 바로 사액을 내렸다. 인흥사(仁興寺)로 이름을 바꾸어 왕이 직접 제액을 써서 하사했다.
비슬산 동쪽의 용천사를 중수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이 절을 불일사(佛日寺)로 불렀으며, ‘불일결사문’을 쓰기도 했다. 불일사는 나중에 용천사로 이름이 바뀐다.
이후 그는 가지산파의 학일스님이 명성을 날리던 운문사에서 지내다가, 개경을 오고가면서 국사의 반열에까지 오른다. 만년에는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의 편찬을 마무리 짓는다. 인각사에서 구산문도회를 개최해 성황을 이루기도 하며, 1289년 향년 84세로 눈을 감는다. 그는 30여년을 비슬산 기슭에서 정진하면서 지냈으며, 비슬산의 기상과 기운을 사랑했다. 때때로 전국 곳곳을 떠돌기도 했지만, 이내 비슬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기 일쑤였다. 그만큼 비슬산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곳이었고, 그의 수행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기도 한 산이었다. 어쩌면 그가 지향했던 삶은 관기와 도성, 또는 반사와 첩사 등의 성인들이 살았던 숨은 은자의 삶이었을까?
비슬산에는 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해발 1천84m인 비슬산은 대구로부터 가창, 화원, 옥포, 논공, 현풍, 유가의 6개면과 청도군에 걸쳐있는 큰 산괴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대견봉은 서편에 월광봉과 필봉을, 북편에 석검봉·천주봉·수도봉을 거느리면서 동으로는 화악산으로, 남으로는 창녕 화왕산으로 뻗는다.
부도군
유가사 부도군은 유가사에서 서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수도암으로부터는 150m 떨어진 곳에 한 줄로 죽 늘어서 있다. 대부분 각종 형태의 기단에 종형의 탑신을 올린 형식을 띠며 조선 후기의 것으로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고승 대덕 스님들이 이곳을 수행처로 삼아 정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청운당성찬대종사(靑雲堂聖讚大宗師), 휴영당대사(休影堂大師),
낙암당대사(洛岩堂大師), 정암당설청대사(晶岩堂雪淸大師),
관월당경수대사(冠月堂景修大師), 동파당진흘대사(東波堂眞屹大師),
규악당명학대사(圭岳堂明學大師), 설곡당처명대사(雪谷堂處明大師),
노곡당사옥대사(老谷堂思玉大師), 봉일당영규대사(奉日堂靈圭大師),
청심당도경대사(淸心堂道瓊大師), 유허당풍열대사(幼虛堂豊烈大師),
취성당하초대사(醉醒堂夏初大師), 백련당세민대사(白蓮堂世敏大師),
월호(月湖), 도봉당해백대사(道峯堂海白大師) 최근 조성된 도성암 성찬스님 - 16기
수도암으로 가는 길목 비슬산유가사중창사적비(1979년)/여곡당선준대사(如谷堂善俊大師)
승병들을 단련했던 유가술
유가사에는 스님들이 수련했던 무술인 ‘유가술(術)’이 전해온다고 한다.
유가사의 ‘유가’란 범어 ‘요가’의 음역이다. 유가사란 유가종의 절이란 뜻이지만, 요가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수도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유가술은 요가를 바탕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라 추측된다. 유가술이 도저한 경지에 이르면 하늘을 날면서 상대의 맥도 짚고, 손발을 공격하면서 창이나 칼 등을 휘어 꺾는 위력을 갖는다고 한다. 임란 당시 이곳은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 사명대사는 승병의 영남도총섭이 되어 팔공산 동화사와 비슬산 용연사 등을 주요 거점으로 승병을 지휘했다. 특히 유가사 지역은 골이 깊은 곳일 뿐만 아니라 왜군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승병 활동의 근거지로 중시됐다.
유가사의 승병 훈련에서는 특히 유가술이 집중 단련됐다고 한다. 유가사를 침입한 왜적들이 천왕문에 들어서자 신비한 힘을 지닌 승려들이 나와서 적들의 무기를 젓가락 꺾듯이 했다. 유가술을 쓴 것이다. 왜적들이 겁을 먹고 줄행랑쳤다. 이 때문에 왜적들은 유가사에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 후 왜적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불을 질러 웅장했던 유가사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사명대사의 부도가 유가사 뒤편에 남아 있다.
유가사 개(괘)불 전설
유가사의 유물 중에 개불이라는 불상이 있었는데 큰 신통력을 가졌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농작물도 다 마르고 흉년이 너무 심해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 불심이 깊던 노인이 개불에 신통력이 있다는 얘기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생각해내고는 이 불상을 재단에 모셔놓고 기우제를 지내자고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그건 그냥 전설에 불과하다고 웃으면서 노인의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가뭄이 너무 심해져서 콩 한줄기도 열리지 않고 비옥하던 토지도 가뭄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다보니 마을의 인심은 더더욱 흉흉해지고 힘이 없는 노인들은 하나 둘 자리에 눕기 시작하고 어린 아이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됐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집안의 가축들을 하나 둘씩 잡아먹기 시작해서 급기야 내년에 농사지을 소 조차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일이 이렇게 위급해지자 마을의 젊은이들이 하는 수 없이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노인을 찾아가 개불을 모셔서 기우제를 지내보자고 제안했다. 이윽고 기우제를 지내기로 한날 마을 사람들이 모였으나 그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모인 사람들은 그 개불의 신통력을 믿고 며칠동안 정상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빗방울이 몇 방울 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아니었으므로 가뭄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빗방울을 본 온 마을 사람들이 이제는 그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모두 모여 불심과 정성을 가지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몇 시간이 지나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큰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땅을 구르고 울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그 이후 곧 나라 안의 큰 가뭄은 해결되었고 사람들의 인심도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두 더욱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이 개불의 신통력이 자자손손 계속 전해져서 나라에 큰 가뭄이 들 때마다 이 개불을 재단에 모셔두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