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버지 성균생원 이번이 지어서 대대로 살아온 집입니다.

이날 운 좋게도 이언적 선생의 17대 종손 이지락님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잠시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간단하게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사람이 계속 살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것 입니다..그것은 문화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죠

다양성있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그 문화를 지키고 있다는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건물들은 사람을 앞도 하지 않습니다. 문화로 느끼지

않으면 그 건물의 가치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무첨당은 양동마을 초기에 지어진

몇 되지 않는 집이고 , 전통방식대로 집을 짓기 위해 목공소와 와가가 설치되어 지어진

최근의 집들은 영귀정과 심수정\으로  약 120년 정도 된 건물들입니다.

유가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내 자손에 대한 도리를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옛 어른들은 집을 재산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동일시 했기 때문에 자신의

호를 집에 붙여쓰는 경우가 많았고 무첨당의 무는 "없을무" 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 ~ 하지 마라" 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외숙부인 손중돈을 스승으로 모셨던 회재선생은 타고난 총명에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있었으니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허나 스승이 연산군 시절 시련을 당한것처럼 김안로일당에게 몰려 낙향하게 되는데 양동으로

가지 않고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지어 여기서 지냅니다.

 

 

달전재사는 조선 태종때 지어진 것으로 전하며 현재는 회재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저~~~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달전재사에서 조금 올라가니 회재 선생님의 묘를 포함해서 여강 이씨 가문의 묘가 제법 많이

있네요.. 관리도 잘되어 있고.. 보기 좋았습니다.

 

 

옥산서원 , 영남 제일의 서원입니다. 흔히 도산서원이 제일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서원이 한창

 힘쓸때 영남의 대표서원은 옥산서원 이었습니다.

콧대 높은 안동의 학자들이 도산서원은 어찌하라며 항의하자 그럼 옥산서원에 제례지내고 올라오는

길에 도산서원도 들렸다 오라는 어명이 있었을 정도... 믿거나 말거나...

당연히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또 철폐되지 않은 47개 서원중 하나겠지요..

그런데 서원앞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하마비(下馬碑)는 어디에???

 

 

편액의 색깔이 다르죠... 왕이 내린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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