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탑은 행인사 일주문 밖 동남쪽으로 약 50미터 되는 곳에 있다. 이 탑은 오랜 내란으로 해인사

주변에서 전몰한 승려와 백성을 위해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받고자 해인사의 훈혁 스님이 

895년에 세운 위령탑이다. 전형적인 신라 계통의 3층탑으로 높이는 약 3미터이다. 

1966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탑지, 157개의 소탑등 유물들이 나왔다.

이 탑지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탑의 건립 내력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안내문 -


 

 

 

보통 탑이라면 ○○사 삼층석탑,

△△사 오층석탑 하는 식으로 층수에 따라 구별하여 보통명사로 부를 뿐,

이 탑처럼 고유명사로 지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66년 여름 일단의 도굴꾼들이 검찰에 검거되고 아울러 탑 안에 안치했던

지석(誌石) 4매와 157개의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탑 따위가 압수되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해인사 입구의 작은 삼층석탑에서 꺼냈다고 자백했다.

4매의 탑지에 적힌 내용도 그들의 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탑지 4매는 모두 규격과 재질이 같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에 두께가 2.5㎝쯤 되고 전(甎),

곧 벽돌처럼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

 

두 장은 앞뒤 양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두 장은 한 면에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첫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뒷면에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가  새겨져 있다.

 

「해인사묘길상탑기」는 최치원이 글을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 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운양대길상탑기」에는 탑의 높이, 소요자재와 경비, 그리고 공사 관련 인물들의 성명 등이 밝혀져 있다.

 

두번째 지석에는 백성사(百城寺) 길상탑 안에 공양물로 봉안하려던 불경 목록이 적혀 있다.

 

세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와 같은 취지로 오대산사(五臺山寺)에 길상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4자씩 떨어지는 운문으로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전몰한 치군(緇軍), 곧 승병들에게 바치는

         조사(弔詞)가 「승병을 애도함」(哭緇軍)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마지막 네번째 지석에는 전란중 해인사에서 사망한 승려들과 일반인 56명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이상 지석에 새겨진 글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탑의 정식 명칭이 ‘ 해인사 묘길상탑’이라는 것, 묘길상탑은 불사리를 안치한 예사 탑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일종의 기념탑으로, 말하자면 전몰장병 위렵탑이라 할 수 있다는 것,

또 하나 승병 혹은 승군이 적어도 통일신라 말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끝으로 동일한 취지의 탑을

해인사를 비롯한 몇 군데 세우려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해인사에만 건립하게 되어 나머지 탑지들을 여기에 함께 넣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탑 하면 으레 불탑, 사리탑이라고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와는 전혀 건립 배경을 달리 하는 탑이 있을 수 있다는 뜻밖의 사실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승군 하면 조선이나 고려시대를 떠올리던 우리에게 신라 승군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점도 여간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최치원과 해인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살생을 무엇보다 꺼려하는 절집이 무슨 연유로 승속을 합쳐 56명이라는 많은 목숨을 희생해가며 전란에 휩쓸리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하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혹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광대한 경제력을 보유한 해인사가 이미 낙조가 짙게 드리운

진성여왕(재위 887~896) 연간의 통일신라 사회에 반기를 든 신흥 지방세력, 아니면 중앙정부나 해인사로부터 오랫동안 피해를 당해온 지방민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어 전란에 말려들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 그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묘길상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 상황을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원의 하나이다.

 

다만 거기서 어떤 정보를 어느 만큼 얻어내는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겠다.

묘길상탑,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큰 탑이다. 보물 제1242호이다.

도굴꾼의 손아귀에서 되돌아온 탑지 4매와 석탑 공양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인터넷 네이버지식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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